2009년 12월 31일 목요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종교적 라이벌이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평소 죄를 덮어 씌우려고 골몰하다

한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지 안 내는지를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물어

 

만약 세금을 내라고 답하면

'어째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십니까!'

라고 말하면서 흠집을 내려 했고

 

만약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면

이 사람이 로마의 법을 어기라고 선동했다면서

법정에 고소해 예수를 잡아들일 계책을 꾸민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을 아신 예수님께서

'외식(위선)하는 자들아 어찌해서 나를 시험하느냐고!' 고

꾸짖으시며 한편으로 이상한 말을 하여서 그들을 꼼짝 못하게 만드셨습니다.

 

세금 낼 돈을 자신에게 보이라 하시고 데나리온 하나를 가지고 나오니

이 동전의 형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고 묻습니다.

 

사람들이 '가이사(카이사르)의 것입니다!' 고 대답하자

'그러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 드려라'

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러자 당황한 바리새인들은 감히 더 묻지 못하고 그 자리를 떠납니다. (22절)

 

그러면 예수님께서 설명하신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가이사의 것은 무엇이고 하나님의 것은 또 무엇일까요?

 

일부 교사는 이 본문을 사람들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돈을 좋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로마 황제는 세금만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기도,찬양,말씀 묵상) 드리길 원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단지 우리가 마음을 드려

주님을 섬겨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런 비유를 드신 것일까요?

 

본문 22장에 이어 23장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정의와 자비와 신의를 지도하지는 않으면서 헌금만 강조하는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셨지만

그래서 박하와 회향과 십일조를 (가이사의 동전으로) 내지 말라고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고 하셨는데 (마태복음23:23)
당시 성전의 모든 헌사 또한 로마 화폐로 통용되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가이사가 돈으로 섬김 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과 달리리

하나님은 돈으로 섬김 받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뜻을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점은 명확히 들여다보지 못하고 있는

이 '하나님의 것' 이란 단어인 것입니다.

 

동전은 가이사의 얼굴과 글이 인쇄 되어 주조되었으니 가이사가 것입니다.

그럼 대체 하나님의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통용되던 데나리온은

당시 로마 정부가 직접 만들고 시민들에게 배포한 화폐였습니다.

여기서 '가이사의 것' 이라 하는 것은 애초에 가이사가 그것을 고안해 배포했다는 뜻입니다.

 

가이사는 이 화폐를 사람들에게 만들고 나누어 주어 가이사의 세상에서 이 화폐가 통용되게

했으며 이 화폐로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게 했습니다.

결국 가이사의 것이 가이사에게 나와서 가이사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만드셔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믿음의 세계에서 통용되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깨닫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 무엇인지 알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구약의 인물 아브라함은 이에 대한 계시를 받은 바 있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노년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독생자 이삭을 얻어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어느날 청천벽력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브라함에게 임합니다.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귀한 아들을 그냥 죽이라는 것도 모잘라 번제물(도려내고 불로 태우는 제사물)로

드리라 하니 아브라함의 고통과 번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가져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라 생각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증언을 추가하자면

아브라함은 죽은 자 중에 능히 자기 자식을 돌려 받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믿음을 가졌다고 했습니다.(히브리서11장17-19절)

 

아들, 이삭은 나뭇가지를 짊어매고

아비 아브라함은 불과 칼을 들고 모리아 산을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산을 오르다 보니 번제물이 보이지 않아 이삭이 아버지께 묻습니다

 

'아버지, 우리에겐 번제할 어린양이 없습니다? (혹시 깜빡 하신겁니까?) '

 

이 말을 들는 아브라함의 마음은 고통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아브라함은 거짓말로 둘러댔습니다.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친히 준비하셨을게다 (창세기22:8)'

 

그런데 이 말이 부지불식간에 예언이 되리라고는 아브라함은 꿈에도 몰랐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단 위에 묶어 놓고

칼로 내려 치려 했고 하나님께서 그 순간 아브라함을 저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눈을 열어 숫양이 수풀에 걸려 있는 것을 보게 하시고

그 숫양으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게 합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감동함을 받아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여호와께서 친히 준비하신다)' 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번제물 사건을 보면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아브라함이 받은 감동을 함께 얻은 것일까요?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예배할 것을 우리를 위해

친히 준비하심을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보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다른 이방의 신들처럼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갈지 고민하셨던 분이 아니라

자신을 예배할 예물 조차 친히 준비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아끼는 독자 이삭을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시는듯 하였으나

사실은 자신을 위한 한 제물을 준비하셨으니

가장 사랑하시는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그 제물이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의 번제 사건을 통해 오실 예수그리스도의 계획을 보게 되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여호와 이레' 를 노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자신께 드릴 제물을 우리에게 내려 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작품이며 하나님의 그림이며 하나님의 글귀가 새겨진 것인데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선물인 자신을 두고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것이다 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가이사의 동전을 보아 왔습니다. 그 동전은 가이사의 영광입니다.

세상에서 모든 경제 활동을 가능케 해주는 능력이며 부의 척도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세상의 왕에게 세금을 바칩니다.

 

이 점은 성경에 명확히 명시되어 있습니다. 세상 무뢰한들로부터 칼을 차고

우리를 지켜주는 권세자들의 (순)기능을 인정하기 위해서라고

세금을 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로마서13:4-6 / 표준새번역)

 

통치자는 여러분 각자에게 유익을 주려고 일하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각자가 나쁜 일을 저지를 때에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는 공연히 칼을 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나쁜 일을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집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진노를 두려워해서만이 아니라, 양심을 생각해서라도 복종해야 합니다.


같은 이유로, 여러분은 또한 조세를 바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꾼들로서, 바로 이 일을 하는 데 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무엇으로 주님께 예배 드리며 나아갑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하나님의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깨달아져야 진정한 예배를 드릴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데나리온(영광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반드시 입어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사인 예수 그리스도(롬6:23)를 입을수록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깊이 관여된 사람입니다.(마태복음18:18-20)

 

그리스도의 지혜로 세상을 다스릴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땅 위의 모든 시험과 악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복을 풍성히 얻고

그 복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다시 돌려 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인 것입니다.

 

가이사는 로마의 황제입니다.

그는 로마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얼굴이 그려진 동전을 소유하길 원합니다.

그는 그 화폐를 통해 사람들이 경제적 활동을 활발히 하고

거기서 나오는 윤택함을 통해

국가에 세금을 내고 모두가 더욱 윤택한 삶을 누리게 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도 안에서 살아가는 국민들은 로마의 군인과 경찰들이 늘 지켜줍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왕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부와 영광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담아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나눠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힘과 지혜와 은사들로써

우리는 모든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의 나라에 헌신하며

하나님 나라의 법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하나님의 천사들이 지켜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모두 가이사의 동전을 사용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세상 군주의 통치를 동시에 받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받은 헌신과 봉사에 대해 무시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이 봉사한 삯을 그들에게 공정히 지불하며

그들의 사회적 역활과 기능을 인정해 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더 좋은 것이 있으니

이 세상이 우리를 박해하고 사방으로 우겨싼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해 썩음을 당치 않는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을  얻어 하나님께 영광을 드려야 하며

그리스도의 얼굴에 비춘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 (하나님의 동전) 이

우리 마음에도 비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열심과 자기 의로움, 기만적인 종교 생활에 쉬이 빠져듭니다.

하지만 예수를 깨닫게 하지 못하는 신앙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혀 영위하지도 하나님의 나라에 헌신하지도 못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쓸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데나리온'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하나님의 것인 예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자신의 열심과 헌신으로

온갖 것을 드리며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러나 그들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과 형상이 담겨 있지 않다면

그 헌사에 하나님께서는 전혀 '불' 로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의 중얼거림을 듣지 않으시며

예배에서 타오르는 연기를 흠향하시고 복을 내리시지도 않습니다.

결코 그런 제물로는 하나님의 나라의 영적인 것을 나누어 주시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어떠한 응답을 얻으려고 기도하다

스스로 실망하고 좌절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가인처럼 예배 드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안의 죽은 것으로 다시 하나님을 섬기길 기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는 하나님께 합당한 것을 드립시다!

아벨처럼, 첫 수양의 기름을 짜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자기 삶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고린도후서4:6-10 / 개역개정)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1:3-4 / 개역개정)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2009년 12월 30일 수요일

죽은 사람들의 장례는 죽은 사람이 치르게 두어라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시자

그 사람은 '주님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게 해 주십시오' (누가복음9:59)

라고 답변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을 듣고서

'그래, 사정이 딱하게 됐구나, 속히 장을 치루고 다시 오려무나' 라고 따듯하게

아량을 베풀시지 않고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사람들에게 치루게 하고 너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해라'(60절)라고

단호히 명령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8장21-22절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은 비교적 교회에서 잘 가르쳐지지 않는 구절입니다.

교사들이 이 말씀을 읽는데 곤란을 겪기 때문입니다.

 

특히 유교의 오랜 영향을 받아 온 우리 나라의 정서상 이런 예수님의 명령은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에 교사들은 부담스러운 이 부분을 뛰어 넘기 쉽상입니다.

 

어떤 교사들은 예수님께서 관, 혼, 상, 제 등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의식보다

선교하고 복음 전하는 일이 더 우선이라는 점을 강조하시기 위해

이런 말씀을 남기신 것이라고 설명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본문의 메시지가 단순히 선교나 전도 운동을 더 열심히 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포기하고 지금 당장 예수님을 선택하라는 명령임을 외면치 말아야 합니다.

만약 그 자리에 여러분이 서 있었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집으로 돌아가시면서 ' 아 예수님은 선교가 더 중요하다고 하시는구나' 라고 하시겠습니까?

 

그 사람은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들은 지 얼마 안된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호수 건너편으로  넘어가시려 하시자 (마태복음8:18)

갈등하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기적과 말씀을 좇아 정신 없이 여기까지 따라왔으나

비보를 들은 상태인데다가 예수님의 일행이 배를 타고 저편으로 건너간다 하니

이 틈에 집에 들렸다 오는게 낳지 않을까 궁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을 아신 것인지 모르신 것인지

예수님께서 하필 그 찰나에 자기를 특별히 지목하시더니 명령을 내리고 계신 것입니다.

'너는 나를 따라오거라 '

 

누가복음9장으로 이 부분을 자세히 읽어 보면 제자가 예수님께 먼저 집에 다녀오게 해달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같이 가자고 말을 거신 것으로 분명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흠칫 했습니다. 뒤로 빠져 나가 조용히 집에 들려 장사를 지내고 오려 했는데

난처하게도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필 자신을 지목하여 지금 따라 오라고 명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는 속사정을 털어놓기로 한 것입니다.

 

'예수님, 사실은 지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나로 먼저 장례를 치루고 돌아오게 해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부디 허락 해 주시죠? (누가복음9:59절)'

 

그는 예수님께서 자기 사정을 잘 모르시고 이런 말씀을 하실 꺼라 여기고

정중히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 장사 지내야 할 상황임을 미리 아시고

의도적으로 이 사람에게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이런 대화의 상황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시는 것은

우리 모두가 그 대화의 내용을 듣고 하나님의 관점을 배우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듣게 되길 원하셨던 말씀을 이제 시작하십니다.

 

'장례식은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도 되지 않겠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여라!'

 

예수님은 여기서 분명히 장례식을 죽은 사람들에게 맡기라고

하셨는데 이 부분을 절대로 무시하고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은 사람들이란 대체 누구를 일컫는 말입니까?

그리고 예수님 말씀 대로라면 장례식은 죽은 사람들이 치루는 것이란 말입니까?

 

본문의 내용을 그대로 들여다 보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필시 많은 의혹이 생겨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이틀 예수님 말씀 안 따라간다고 무슨 일 나는 것인지

또 몇일 장례 치루고 오는 것까지 꼭 이렇게 틀어 막으셔야 하는 건지

예수님의 재촉하심이 이해가 안갈 것입니다.

 

대중적인 신앙인들은 극단적 신앙이 좋지 않다, 좋지 않다 서로에게 강조하곤 하는데

이럴때 보면 예수님보다 더 극단적 신앙심을 가지신 분도 있을까 싶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대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이유는

언제나 그분의 시각과 우리의 시각 차가 너무 크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이 중요하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영적인 관점(마음)을

육체의 방식으로만 듣고 그 내용을 제한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죽은 자들' 이란 표현에 더욱 집중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라는 표현은 누가복음20장 38절에서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두개인들이 일곱 형제와 차례로 잠을 잔 여자가

부활 후 누구의 아내가 되냐며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다' 라는 대답 하시면서

'죽은 자' 란 표현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누가복음20;38,마가복음12:27)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산 자들이 누구라고 언급하시는가 하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영원히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는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느냐고 사두개인들에게 반문하십니다.

 

그러면 여기서 죽은 자들이란 누구를 두고 하는 말입니까?

 

바로 이 질문을 해온 사두개인(성직자들)들처럼

영의 세계를 도무지 믿지도 않으며 부활을 믿지도 않으며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의 계획과는 아무 상관없이 사는 자들로써

세상의 혼인, 관직, 장례, 부, 명예와 관련된 것에만 열심히 관심 갖고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실상 제사장의 신분을 가지고 있으나

하나님께 있어서는 죽은 자들로써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판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사두개인들에게 하십니다.

 

' 부활을 믿지 않는 너희들에게 부활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살아 있는 하나님을 비웃고

살아있는 하나님 나라를 비웃고

마치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냥

어줍잖은 태도로 말씀을 넘겨 보며

세상의 규율과 문화만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희는 사실상 하나님께 죽은 자들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이름을 매일 회당에서 들먹 거리고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사람들에게 교사 노릇을 해 왔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아무런 관계도 맺고 있지 않으므로

너희들은 하나님의 계획을, 부활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너희 죽은 자들과는 상관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이 살아있는 자들 안에서 영원히 사신다.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

 

우리는 이 땅 위에 태어나 사람이 만들어 놓은 문화와 규율에 따라

열심히 그것들을 실천하며 평생을 살아갑니다.

 

굳이 유교 문화를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장사 지내는 풍습은 모든 나라에 걸쳐 중요하게 여겨겨온 인류의 문화 유산입니다.

 

그런데 이런 풍습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땅에 묻는 의식은 사람의 불완전한 감정과 깊게 관계 맺고 생겨난 것입니다.

 

곧 죽은 사람을 방치할 경우 그 영혼이 고통을 받을꺼라는 생각들이나

시신을 잘 수습하고 묻어 주면 그의 영혼이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제사를 드리면 떠도는 혼령이 그 음식을 먹고 배고푸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등

 

남겨진 살아있는 자들이 가진 '죽은 자(망자)에 대한 미련과 죄책감' 등이

장사를 중요한 의식으로 만든 것입니다.

 

남겨진 자들은 죽은 자에 대한 정과 미련을 쉬이 끊지 못합니다.

그래서 깊은 땅에 묻는 의식을 통과하면서

자신이 사는 삶과 죽은 자의 삶을 분리시키는 정서적 해결책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사를 성대히 지내든 장사를 못 지내든 죽은 사람은 흙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길거리에서 비명 횡사한 사람이나

조용히 집에서 잠 자듯 숨을 거둔 사람이나

사람은 모두 죽으면 한달 안에 살이 부패하여 구더기의 밥이 다고

뼈도 시간이 흐르면 흙이 되어 나무의 거름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마지막날 모든 죽은 자가 하나님 앞에 일어나 그 삶을 평가받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정하신 일이며 죽은 자들에 대한 계획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허망한 감정으로 죽은 자와 교제를 시도하며 죽은 자를 위하여

시간과 재정을 계속 할애합니다.

하지만 죽은 자는 더이상 산 자와 교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Fact)입니다.

 

오직 관계라는 것은 '살아있는 동안만 맺을 수 있는 것'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살아있는 동안에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산자와만 맺는 동행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오늘날도

장례와, 제사, 망자에 직찹하며 시간을 할애합니다.

 

하지만, 장례를 아무리 잘 치뤄도 죽은 영혼에게는 더 이상 복음이 전해지지 않습니다.

장례를 잘 치루어도 죽은 자는 산 자에게 공양을 받지 못하며

영혼이 더 고통받거나 덜 고통 받게 되지 않습니다.

장례에 상관없이 모든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오직 살아 있는 동안 살아온 일들을 가지고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모든 관계를 맺으시고

살아있는 동안 우리가 천국에서 받을 유산을 결정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얼마나 받을수 있는가 하는 것이

오직 살아있는 동안에 결정된다는 사실을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써 인정되어 영광스러운 부활의 약속에 동참하게 될지 아닐지도

모두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결정될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 되면 예수님께서 지금 당장 나를 좇으라고 재촉하시는 것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살아 있는 자는

죽은 후에도 부활하여 영원히 하나님의 생명 속에 거합니다.

 

반면 장례식은 유한한 존재로 태어나 죄 속에 뭍혀 살다가 죽어야 하는

그러나 영원한 삶과 천국을 원했던 부족한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사후를 준비시키려고 만들어 낸 감정적 창조물인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복음서 여기 저기서 여러가지 비유를 들어 증언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오직 바로 이 순간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와 얼마나 관계맺고 있는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살지 않는 사람들은

어제와 같이 밭을 갈러 나갈 것이며, 혼인식에 나갈 것이며, 장사 하러 나가고

장례식을 찾아 다니겠지만

어느 날 하나님의 초청은 부지불식간에 끝난다는 사실을 잊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누가복음14:16-24절에 이 이야기는 소상하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노아의 때도 홍수가 나기 전까지 모두 장가 가고, 시집 가고

사람의 유행대로 살더니 갑작스런 심판이 모두에게 일시에 임한 사실을 말입니다.

 

(마태복음24:36-38 / 개역개정)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평생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를 궁리하며 삽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 누구와 혼인하며 아이를 낳고 살며

또 장례식을 어떻게 치룰까 생각하다 인생을 전부 보내게 됩니다.

 

사실 우리를 귀찮게 하는 수많은 보험 상품들은

현대인들의 육체에 속한 계획이 어느 날 일시에 무너질 수 있다는 불안감을

잘 보여주는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과 얼마나 관계 맺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는 이유로

우리 자신이 처한 심각한 위기성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오늘도 교회에 성경책을 끼고

왔다 갔다 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완전하게 죽은 자로 그 날에 판결 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영원한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평생을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불완전한 신화와

미신과 행복의 조건들을 따라

보험 들고, 적금 붓고, 결혼식 올리고, 아이를 낳고, 장례식만 치르다

어느날 죽게 될 것이며

눈을 다시 뜨고 사방을 둘러 보았을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며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죽은 자였음을 깨닫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가서 안다고 하여도 때는 늦은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믿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삶과 너무 다른 영원한 삶이 있다는 것,

새로운 약속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영적으로 살아있는 교제를 하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역사적으로 늘 있었다는 사실을

굳이 믿고 싶지도 알고 싶어도 않아 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지은 모래성 위에서 사는 것이

당장에 썩 나빠 보이지 않았기 떄문에

그것을 자랑하며 자신들의 불안감을 해소시켰습니다.

 

또 종교적 행위를 반복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나 된것 양

자기 마음에 암시를 걸었습니다.

 

그들의 정체를 간략히 정리해 보자면

세상의 계획에 의존하여 살면서

하나님과의 계획과는 아무 상관 없는 종교적 행위로만 자신을 치장하고 사는 것이

그들의 실체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가 세상에 의존할 곳이 조금도 없으리라 여기셨을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보고 있는 본문 누가복음 9:26절 바로 앞 구절에는 이런

증언이 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둥지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둘곳도 없다'

 

예수님께서 평소 자신이 무엇에 의지하며 사시는지를 명확히 밝히고 계시는 구절입니다.

 

그것은 썩어질 세상의 시스템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신실하신 약속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주실 영원한 안식처를 바라보고 계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는 또 한 걸음을 내 디딥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하려 하지도, 기대하려 하지도 않는 마음으로

오늘도 어제와 다를 바 없는사람이 만들어 놓은 온갖 행사를 챙기며

그곳에서 감정적인 안녕, 영원한 교류를 헛되이 지어내려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가장 우선적으로 예수님을 찾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 모두 그들의 고향을 등지고

세상의 풍습을 버렸으며 오직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을 좇아 살았습니다.

 

그들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에게 직업이, 고향과 가족이, 부모와 형제와 친구가 전혀 중요하지도 않으며

필요치도 않았기 때문일까요?

 

베드로는 먹고 살지 않아도 되서 그물을 던져 버렸으며

아브라함은 사람의 도움이 전혀 없이도 살수 있어서

고향을 등지고 광야로 나아간 것일까요?

 

사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여전히 밭을 갈고 장례를 치르며 혼인을 했습니다.

 

바울은 텐트를 만들어 팔았고, 베드로는 결혼 했으며

다비다란 여인이 죽었을때 그를 따르던 많은 여인들이

그녀의 집에 몰려 들어 장사를 지내며 슬피 통곡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베드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다 순교 했으며

다비다는 베드로가 기도로 죽음에서 다시 일어섰습니다.

 

다비다처럼, 베드로처럼, 바울처럼 우리도 부활의 약속에 이미 동참한 자가 되었을까요?

 

그러므로 잊지 마십시오. 부활의 약속에 동참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는 계획을 발견하고

그 계획에 침노해 들어갈수 있는 시간이

우리 각자에게 얼마나 남아 있는지는 아무도 알수 없습니다.

 

각 사람을 향한 새로운 창조의 계획을 이해하지 못하고

부모와 형제와 친구의 계획과 설계를 좇아 산다면

하나님 나라에서 당신은 무상속 자녀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아야 합니다.

 

많은 교회가 오늘도 교인들에게 간단한 주술만을 외우게 합니다.

예수란 이름만 믿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교회당에 열심히 다니고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란 주문만 열심히 외우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아십니까?

'예수' 란 이름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흔한 이름입니다.

 

나사렛에서 자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는 그래서 우리에게 이렇게 증언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늘' 에 계신 '나의 아버지'

뜻을 따르는 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

 

예수 주문을 외워도 육신의 아비 뜻을 따라 평생을 바친 사람은

하늘 나라를 물려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배움의 기회가 있을 때, 지금 이렇게 살아 있을 때

당신은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지금 선택하라고 예수님께서 단호하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죽은 일은 죽은 자들이 늘 하던 일입니다.

죽은 섬김은 죽은 자들이 죽은 방식으로 서로를 대해온 수천년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산 것을 받아 아버지의 영원한 계획대로 이 땅에서는 나그네처럼 살아야 합니다.

 

오천년 전이나 오천년 후에나

사람들은 죽은 일을 의미있게 보낸다고 자축하겠지만

그들이 심판대 앞에서 모두 죽은 자로 드러날 것입니다.

 

산자들은 오천년 전에나 지금이나 늘 하나님 앞에 살아 있어서

부활의 날에 하나님의 아들로 입증될 것입니다.

 

마지막 날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마라나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의 계획들이 모두 나타나고 있으며

그 계획마다 침노하는 자들이 들어가 얻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11:12)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 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굳이 뒤로 돌이키지 마십시오 (마태복음24:17)

 

예수님의 강력한 요청인 것입니다.

 

2009년 12월 29일 화요일

하나님은 하드(Hard)맨?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으러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귀인은 자신의 종 열을 불러 자기 소유를 나눠 맡기고

여행을 갔습니다.

 

그리고 왕위를 받은 후 돌아온 귀인은 한 므나씩 나누어 주었던 재산을

종들이 각각 어떻게 관리했는지를 알아 보려 했습니다.

 

한 사람이 왕 앞에 나아와 자신이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만들었다고 보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 종을 칭찬하며 열 고을을 차지하라는 직분을 하사 했습니다.

 

한 사람이 나와 자신은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 종을 칭찬하며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이 나아와 자신의 수건에 싼 한 므나를 보이면서

당신이 단단한 사람(hard man)이라

내가 무서워해서 이리 보관을 해 두었다는 설명을 했습니다.

 

덧붙여 당신이 두지 않은 것에서 취하며 심지 않은 것은데서 거두는 분이라는 설명을 합니다.

 

그런데 주인은 이 설명을 듣고 불같이 화를 냅니다.

내가 무서운 줄 알았다면 그 돈을 누군가에게 맡겨 이자라도 받아두지 그랬냐고 하면서

그 종을 꾸짖고 그 있던 돈마저 뺏어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곁에서 듣던 종들은 왕의 처사가 불공평하다 여겨서 일제히 고합니다

"주인이시여, 그는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25절)"

 

그러자 주인은 종들에게 기이한 말로 답을 합니다

"있는 자는 더 받을 것이고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길 것이다! (26절)"

 

그리고 자신의 왕위를 반대한 자들을 모두 끌어내 처단하는 것으로

자신의 마을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 대한 처결을 마칩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이와 거의 유사한 이야기가 나와 있는데

조금 단어가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인이 다섯 달란트, 두달란트, 한 달란트를 각 종에게 재능대로 나누어 주고

다시 돌아와 셈 하는 내용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상을 주는 방식이라든지  마지막 종의 남은 소유를 빼앗아

처음 종에게 주는 내용이 같은 점으로 미루어

본질적으로는 두 이야기가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지 않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록된 내용 중에는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하나 있는데

바로 HARD MAN 이라고 종이 주인을 칭하는 부분입니다

(누가복음19:21절 / 마태복음25장24절)

 

하드 맨? 딱딱한 남자? 이게 대체 무슨 뜻일까요?

 

한국어로 번역된 여러 성경들(개역/표준/쉬운/우리말)은

마태복음에서는 '굳은 혹은 완고한 사람', 으로

누가복음에서는 '엄한 사람'으로 이 단어를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엄한 사람이든 굳은 사람이든 이런 번역은 문맥상 어색함이 많습니다.

 

이 단어를 헬라어 성경으로 다시 찾아보면

sklhrov"  [스클레-로스] skleros 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스클레로스라는 단어는

형용사로써 hard, harsh, rough, stiff, violent, offensive, intolerable

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대부분 상대방에 대해 불편하게 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의미들로써

폭력적이고, 거칠고, 참을수 없는 등의 의미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상대를 괴롭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단어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하지만 종이 대놓고 주인에게 당신은 폭력적이며 참기 힘든 사람입니다 라고

항변하고 있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주인이 두려워 맡겨준 므낫조차 수건에 싸 둔 소극적인 태도의 소유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엄한 혹은 굳은 이라 표현된 해석은

Hard 라는 단어가 가장 흔하게 전달하는 뜻처럼

'어려운' 으로 해석하는 게 더 좋을 것입니다.

 

우리 말로 쉽게 표현하자면 종은 주인게게

'당신은 까다로운 사람이라서'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은 이런 이야기를 주인에게 아뢰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평소부터 (관계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늘 까다롭게 대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당신의 처결이 두렵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당신은 심지 않은 데서 거두어 들이고

헤치지 않는 데서 모아 들이는 분이니시

제가 이렇게 한다 해서 크게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심지 않는데서 거두어 들인다는 표현은

언뜻 남의 물건을 약탈해 재산을 끌어 모은다는 말로 들릴 수도 있지만

본문에서 왕위를 물려받고 돌아온 귀인은 예수님 자신을 뜻하는 것으로써

창조주이신 주인에게 종이 아부를 하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이 까다롭게 사람들을 대하시기 때문에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 할 수 없었고

내가 돈을 벌지 못하더라도 본시 주인이 너무 부자라서

나의 소극적인 행위가 주인에게 크게 손해 갈 것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종은 자신만의 철학이 있었던 것입니다.

주인이 맡겨준 므나를 수건에 고이 싸서 묻어 놓은 이유는

평소 주인의 어려운 뜻을 이해하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얻어야 할 교훈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교훈이 무엇일가요?

 

바로 이 종과 같이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자들이 오늘날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도

'아마도 이렇게만 해 두면 안전할꺼야~' 라고 스스로 판단하여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안일하게 생각하는 처신법이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본문의 이야기는 사실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계시입니다.

왕위를 받고 오시려고 잠시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맡긴 사람들은

믿는 우리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귀인이 종들에게 나누어 준 은화 므낫(보석의 중량을 재는 단위)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며

이 므낫으로 장사를 하여 이득을 남긴다는 것은 또 무슨 행위를 뜻하는 것이며

한 므낫을 수건에 감추어 묻어 두는 행위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며

하다 못해 이자라도 나오게 맡겨 두었어야 했다는 말은 또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성경의 감추어진 많은 비유들을 깨닫기 위해서

늘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자세를 길러야 합니다.

 

은화는 예수님 자신의 재산이셨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예수님 자신의 보물이 무엇일까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의 재산이면서 동시에 따르는 자들에게 맡겨 주실 수 있는 것,

그러면서 그것을 우리의 자력으로 증가시킬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비춰질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그것을 성령의 은사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예언과 치유, 귀신을 내어좇는 능력, 지식과 지혜, 방언은

예수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우리에게

맡겨 주신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신

일정한 부와 재능(talent)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마태복음서 25장의 기록은 실제로 이런 의미에 무게를 더 많이 실어 기록된 듯 합니다.

(관심있는 분은 마태복음 25장 후반부를 눈 여겨 읽어 보십시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 모두에게 동일하게 나누어 주신 은화 한 므나가

무엇인지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사람의 재능(Telent)이나 성령의 능력(Gift of Spirit)은

모든 이들에게 동일한 정도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간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자신이 소유하고 계셨던 것 중에

가장 우리에게 나누어 주고 싶어하시며

모두에게 동일하게 그 가능성을 나누어 주시면서도

이땅에 돌아 오셨을때는

우리 안에서 가장 먼저 찾으실 영적인 자산이 무엇일지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제 생각에 분명 '믿음' 일 것입니다.

필자가 그렇게 결론을 내리는 데에는 두 가지의 성경 구절이 도움을 줍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기도에 대한 설교를 하시다

돌아올 날에 대하여 탄식하는 말을 남기시는데서 그 근거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18장8절 / 개역개정)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믿음으로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치시다

인자가 다시 돌아올 때에 세상에 과연 이러한 믿음이 존재하겠느냐 라고

제자들에게 반문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실 때에는

제자들이 이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반드시 확인해 보시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필자는 바울의 고백 속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증가되는 선물을 발견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6절-7절 / 표준새번역)

"어둠 속에서 빛이 비쳐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엄청난 능력이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드러내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언급하는 엄청난 능력이란 예수님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하는 빛으로부터 나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을 알게하는 빛은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게를 맺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인격이 우리 안에서 증가하게 해주는 살아있는 믿음의 길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질그릇에 이 보물을 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알게 하는 믿음의 지식을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님께서 10명의 종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신 은화 한 므나가

우리의 질그릇에 담아 주신 이 보물

곧 하나님을 아는 빛,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동일한 믿음의 기회를 주십니다.

모두 같은 말씀을 볼수 있게 해 주시며 같은 이름으로 기도할수 있게 해 주시며

같은 성령을 얻게 허락해 주십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같은 선상에서 경주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형제는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만들어

열 고을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예정된 계획에 도착하게 되고

어떤 형제는 한 므나를 묻어 두고 마지막 날에 할 변명거리나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저는 주님이 당췌 어렵고 이해 불능이신지라

저를 만나주신 은혜로운 경험을 고이 간직하고 살아 왔습니다.

주님은 굳이 제가 뭘 열심히 하지 않더라도 늘 스스로 모든 것을 하시는 분이니

내가 굳이 열심을 내며 살게 뭐 있습니까?'

 

하지만 그러한 삶을 선택한 사람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님을 알게 한 빛이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비밀들은 더 많은 믿음의 지경을 구하는 자들에게 옮겨질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정해진 법칙인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자는 더 있게 될 것이며

믿음이 없는 자들은 있던 적은 믿음조차 사라질 것입니다.

이것이 있는 자는 더 있게 되고 없는 자는 더 없게 되는 법칙입니다.

 

지금은 우리 모두가 같이 앉아 찬양하며

한상에 앉아 떡을 떼며 교제하지만

어느날 세상의 모든 것이 뒤바뀌는 날

우리는 그리스도 앞에서 믿음의 측량추를 따라 갈라서게 될 것입니다.

염소와 양이 좌, 우로 나뉘어지듯 말입니다.

 

그 날에 두 사람이 같은 이불에서 자다가 일어나 보니 한 사람만 남아 있게 되고

두 사람이 함께 밭을 갈다가 한사람만 남게 될 것입니다.(마태복음24:40-42)

 

이것은 우리가 마지막날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던지 아니던지

이미 정해진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나 일부 영적으로 무식한 교사들은 오늘도 우매한 말로

성도들에게 헛된 평안을 전하며 마지막 때를 준비하며 살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원래 하나님은 이해가 불능이신 분이시고 그분의 뜻은 심오하셔서

우리가 다 알려 들어도 알수 없는 것이라며

늘 하던 대로 열심히 자기 삶을 열심히 살아가고

목사님 말만 잘 들으면 만사 형통하게 된다는 소경의 가르침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도 그렇게 가르치는 교사들과

그런 가르침이 옳다고 철썩같이 믿는 분들에게 한가지를 꼭 묻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께서 나눠 주시는 하나님의 빛,

그 반짝이는 한 므나는 지금 대체 어디에 묻어 두신 것입니까?

 

우리는 평생 성령을 따라 살며

그분의 성품을 배운다 해도 그분을 다 알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의 주요, 또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의 많은 부분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주인께서 기대하고 계시며 마지막 날의 심판과 상급 내리심을 앞두고 계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명확한 증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사람이 따를 수 없다 하면 되겠습니까?

그것은 거짓된 겸손에 불과합니다.(골로새서2:18)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과 계획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빛을 따라

주님께서 부요한 믿음의 유산과 그 나라의 다스림을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핑계대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본래 이해하기 힘든 분이고 나는 원래 이렇게 믿음이 적은 사람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여러가지로 호소하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우리의 적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서라도

이자를 벌어 예수님의 나라를 확장하라고 명령 하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과 마음을 합하여 물신양면으로 그들을 도우며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나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취리하는 자에게 맡겨 자신의 이자를 찾는 원리인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성령으로 깨달으십시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대접하면 선지자의 상을 받는다고 써 있는 것은

이런 영적 원리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분간할 것은

많은 헌금을 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선지자를 대접하지 않았다면

그는 하늘 나라에 이자를 쌓지 못합니다.

그것은 사기꾼에게 자신의 돈을 빌려주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의 이름으로 소자와 선지자를 대접하는 자들 역시

자기 받을 상을 이미 다 받아서 이자를 받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접하는 자가 예수님과 함께 상을 함께 누릴 것입니다.

(마태복음24장41절/ 마태복음6장2절)

 

구름같이 허다한 믿음의 형제들이 모두 처음에는 한 므낫을 받고

세상으로 나아갔습니다. 저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태어날때부터 믿음이 좋은 사람도 있을까요?

 

그런데 누군가가 돌아올 주인을 대비해 변명할 궁리나 하면서

삶을 몽땅 썩어질 곳에 투자하고 다른 곳만 바라보며 살다가는

그는 주인에게 화를 당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형제는 그 시간에도 다시 오실 예수님의 영원한 나라를 기대하며

주인이 오셔서 의자에 앉으실 때까지 허리를 동이고

믿음의 경주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누가복음17장8절)

 

저는 이 경주의 끝을 봅니다.

오늘날 사두개인들처럼 하나님의 계획을 무시하는 수많은 (영으로)

죽은 무리들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계획과 약속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상급과 영원한 보좌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따라 살면서도

더 큰 믿음을 구하며 나아감으로

그날이 이르면

열고을 아니 백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물려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천국만 들어갈 수 있으면 된다!

너처럼 광신적 신앙 생활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평범하고 평균적인 삶을 원한다. 튀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나의 건전하고 일상적인 신앙 생활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다.'

 

고 하시는 분들에게

저는 담담하게 대답할 것입니다.

 

얼마든지 원대로 하십시오.

하지만 예수님께서 당신을 다시 만나셨을 때

그분이 당신에게 어떤 상이나 칭찬을 내리시길 기대하지는 마십시오.

 

오늘 성경을 읽어 보니 한 므나를 땅에 묻어 놓고 예수님 오실날까지

예수님과 상관없이 살아간 종들은

그때에 예수님께 꾸지람을 듣고 어두운데 좇겨나 이를 갈면서

슬퍼하리라 기록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그곳이 설마 지옥이냐고 제게 따지시려는 분들

복잡한 교리, 먼지 쌓인 은혜의 기억을

들춰 내면서 성질 부리시려는 분들은 잠시 멈추어 보십시오.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시는 그 문

(예수님이 계시는 그 곳)

아마 들어가실테니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어떤 이들이 어두운데 쫓겨나고

이를 갈고 슬퍼할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곳은 바로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크고 웅장한 개선 나팔 소리와

왕같은 족속들의 흥겨운 잔치 소리 때문에

귀를 틀어막고 이가 갈리는 자리일텐데 말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인간들의 감정과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시는

이해하기 힘들고 까칠한 분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물쩍 정의하고 넘어가려 해도 그분은 그분이실 뿐입니다.

 

우리 주인은 오직 믿음의 주 (the author and perfecter of our faith) 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정확한 원칙과 계획에 따른 영원한 계획으로 지금도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영원 불변합니다.

아침에 뜨고 지는 태양처럼 늘 그 자리에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우리의 위치를 떠나

그 곳으로 방향을 틀어 향하는 일 뿐입니다.

 

만약 어떤 이의 삶이 늘 불평으로 가득하고

하나님은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는 분이며

하나님을 믿어 무엇하냐는 회의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런 분은 자신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 보십시오

 

나는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알고 있는가?

나의 삶은 천성을 향해 걸어가는 계획에 따라 맞추어져 있는가?

아니면 이 세상 사람들이 따르는 계획들로 가득차 있는가?

 

오늘도 내가 계획하고 뛰어 든 삶에 예수님이 발견되지 않고 실망하면서도

내일도 다시 그리로 뛰어들 계획을 세우며

두려운 삶을 반복하고 있다면

사울처럼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사람임을 깨달아야 할것입니다.(사도행전26장14절)

 

예수님이 피로 맺으신 계획과 언약은 늘 불변하여

그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푯대가 되어 왔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가지

우리의 감정과 생각의 혼돈과는 상관없이

변하지 않을 영원한 생명의 계획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답니다. 할렐루야!

 

2009년 12월 21일 월요일

기나긴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읽으실 때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성경을 들여다 보십니까?

 

우리가 가까운 서점에만 나가 보아도

단 한가지 성경 말씀에 대해서 여러 각도로 풀어놓은 책들이 즐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같은 말씀을 보아도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고

강조점이 다르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꺼라 여기십니까?

 

우리는 어떻게 해야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의 본래 뜻을

파악할 수 있으며 그 뜻대로 살아 생명을 거둘수 있을까요? (요5:39)

 

예수님 본인은 자신의 어려운 가르치심들에 대해

제자들에게 어떻게 해야 그것을 깨우칠수 있다고  말씀해 주셨을까요?

 

성경의 기록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대신 보내 주시는 보혜사 성령께 배운다면 지금은 어려워서 잘 이해할수도 없고

또 기억하기도 힘든 말씀들을

모두 생각나게 해 주시고 하나 하나 가르쳐 주신다고 말입니다.(요14:26)

 

그리고 고린도전2징10절에서는

오직 (다른 것으로는 아닌) 성령으로만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통달 할수 있다고

못박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 교사들은 성령(의 계시나 경험)을 통해 말씀을

해석하는 것은 자신의 감정에 치우쳐 있거나

신비주의적이라며

다른 도구들 예를 들면

원전 해석, 시대적인 문화와 배경 연구, 저자의 자라난 환경과 성격 분석, 단어의 연계성과 문맥 연구등을

사용해 성경을 해석해야만

그것이 성경 중심적 해석 방식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로 인해 성령님은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직접 말씀을 가르쳐 주시는 자리로부터 쫓겨 나셨으며

성도들을 위로 하시거나 예언, 방언, 치유의 선물을 베푸시는 위치에만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깊은 뜻을 이해하려면

성령이 아니고서는 안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 역시 성경이 스스로 설명을 내 놓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2:10-11절을 읽어보면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아무도 알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정 역시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써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새의 생각을 새밖에 알수 없고 꽃의 생각을 꽃밖에 알수 없듯이

사람의 생각은 사람만이 알고 하나님의 생각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하나님의 생각(Spirit)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계시(열어 보여준다)해 주실 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성령이 주시는 마음을 받지 않고서

어미의 뱃속에서 태어나 인간의 사회에서 살아온 체로

사람의 인문학적 도구를 동원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속사정을 꿰뚫어 볼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까?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런 주장이 더 신비주의에 가까우며

궤변에 가까운 논리인 것입니다.

 

성경의 증언처럼, 또 예수님이 직접 제자들에게 이르신 것처럼

그것이 우리에게 낯선 영역이라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속에 계셨던 하나님의 영으로만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을 알수 있습니다.

 

때문에 영으로 쓰여진 성경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이 그 숨겨진 뜻을 이해 할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나는 오직 인문, 사회, 철학적 연구 방식(위에서 열거한)들을 통해서만

성경을 파해칠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면

제 생각에 그 사람은 결코 자신의 교육적 배경과 인간관계에서 느낀 감정,

윤리적 선입관을 벗어나지 못한 체

성경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성경 중심적인 해석가이다라고 자칭 말하는 사람들은

사실 자기 마음대로 자기의 안경을 끼고 성경을 보는 가장 주관적인 해석가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결코 나의 의견을 개입시키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 천지에 없습니다.

만약 그게 가능하려면

위로부터 새로운 마음을 받은 사람이 새로운 마음과 눈으로 성경을 바라볼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 성령의 절대적인 역활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제가 이곳에 연재할 성경 말씀 해석들은

다양한 성경 해석중 하나로써 여러분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시키는데 의미를 두고 있지 않습니다.

 

혹은 다른 교사들과 논리적으로 다투어 저의 해석 방식을

더욱 설득력 있게 보이려고 애쓰지도 않을 것입니다.

 

말씀은 양식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 썩지 않을 만나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을 통해 열려진 말씀을 들을때 그것은 어떤 이들의 마음을 열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단지 어딘가에서 그리스도의 심령을 갈급해 하는

단 한명의 신부된 형제라도 있다면

들을 귀 있는 한분의 자매를 위해

 

신랑의 포도나무에서 나오는

그 즐거움의 생명을 함께 누릴 것입니다.

 

나는 먼저 그 잔치에 참여하여 그분에게서 나오는 것을 즐거이 먹고 마셨습니다.

 

지금 나의 책임감은 내가 예전에 가졌던 육신의 생각과 감정을 버리고

새롭게 보게 된 하나님의 마음이 기록된 이 책을

사람들에게 동화를 들려 주듯 천천히 이야기해 주는 것입니다

 

이 글을 쓰는 저 또한 인간이고

모든 방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다 깨달아 알고서 이 일을 시작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소망합니다. 성경이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사람의 행위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으며

아버지의 마음을 전하는데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 마음을 받은 자들이 거룩하게 되어지는데 성경이 기록된 목적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알릴수 있다면

저는 그것으로 할일을 다 하는 것입니다.

 

곧 제 생각과 감정이 아닌 완전히 그 출발점을 달리 했던

그리스도의 세계를 통해 보게 된 성경의 뜻과 의미

그리고 그를 통해 알게 된 아름다운 복음의 의미들을

여러분에게도 나누어

 

행위로써가 아닌 심령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나타나실 여러분을 고대하며

이 글을 연재해 나갑니다.

 

성경을 연구할지라도 깨닫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바리새인들은

마귀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요8:44)

 

그러나 무릇 하나님의 영(마음)으로 인도함을 받게 되는 자들은

성경의 약속처럼 하나님의 자녀로 그날에 나타날 것입니다(로마서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