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30일 수요일

죽은 사람들의 장례는 죽은 사람이 치르게 두어라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시자

그 사람은 '주님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게 해 주십시오' (누가복음9:59)

라고 답변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을 듣고서

'그래, 사정이 딱하게 됐구나, 속히 장을 치루고 다시 오려무나' 라고 따듯하게

아량을 베풀시지 않고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사람들에게 치루게 하고 너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해라'(60절)라고

단호히 명령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8장21-22절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은 비교적 교회에서 잘 가르쳐지지 않는 구절입니다.

교사들이 이 말씀을 읽는데 곤란을 겪기 때문입니다.

 

특히 유교의 오랜 영향을 받아 온 우리 나라의 정서상 이런 예수님의 명령은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에 교사들은 부담스러운 이 부분을 뛰어 넘기 쉽상입니다.

 

어떤 교사들은 예수님께서 관, 혼, 상, 제 등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의식보다

선교하고 복음 전하는 일이 더 우선이라는 점을 강조하시기 위해

이런 말씀을 남기신 것이라고 설명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본문의 메시지가 단순히 선교나 전도 운동을 더 열심히 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포기하고 지금 당장 예수님을 선택하라는 명령임을 외면치 말아야 합니다.

만약 그 자리에 여러분이 서 있었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집으로 돌아가시면서 ' 아 예수님은 선교가 더 중요하다고 하시는구나' 라고 하시겠습니까?

 

그 사람은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들은 지 얼마 안된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호수 건너편으로  넘어가시려 하시자 (마태복음8:18)

갈등하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기적과 말씀을 좇아 정신 없이 여기까지 따라왔으나

비보를 들은 상태인데다가 예수님의 일행이 배를 타고 저편으로 건너간다 하니

이 틈에 집에 들렸다 오는게 낳지 않을까 궁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을 아신 것인지 모르신 것인지

예수님께서 하필 그 찰나에 자기를 특별히 지목하시더니 명령을 내리고 계신 것입니다.

'너는 나를 따라오거라 '

 

누가복음9장으로 이 부분을 자세히 읽어 보면 제자가 예수님께 먼저 집에 다녀오게 해달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같이 가자고 말을 거신 것으로 분명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흠칫 했습니다. 뒤로 빠져 나가 조용히 집에 들려 장사를 지내고 오려 했는데

난처하게도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필 자신을 지목하여 지금 따라 오라고 명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는 속사정을 털어놓기로 한 것입니다.

 

'예수님, 사실은 지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나로 먼저 장례를 치루고 돌아오게 해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부디 허락 해 주시죠? (누가복음9:59절)'

 

그는 예수님께서 자기 사정을 잘 모르시고 이런 말씀을 하실 꺼라 여기고

정중히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 장사 지내야 할 상황임을 미리 아시고

의도적으로 이 사람에게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이런 대화의 상황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시는 것은

우리 모두가 그 대화의 내용을 듣고 하나님의 관점을 배우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듣게 되길 원하셨던 말씀을 이제 시작하십니다.

 

'장례식은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도 되지 않겠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여라!'

 

예수님은 여기서 분명히 장례식을 죽은 사람들에게 맡기라고

하셨는데 이 부분을 절대로 무시하고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은 사람들이란 대체 누구를 일컫는 말입니까?

그리고 예수님 말씀 대로라면 장례식은 죽은 사람들이 치루는 것이란 말입니까?

 

본문의 내용을 그대로 들여다 보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필시 많은 의혹이 생겨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이틀 예수님 말씀 안 따라간다고 무슨 일 나는 것인지

또 몇일 장례 치루고 오는 것까지 꼭 이렇게 틀어 막으셔야 하는 건지

예수님의 재촉하심이 이해가 안갈 것입니다.

 

대중적인 신앙인들은 극단적 신앙이 좋지 않다, 좋지 않다 서로에게 강조하곤 하는데

이럴때 보면 예수님보다 더 극단적 신앙심을 가지신 분도 있을까 싶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대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이유는

언제나 그분의 시각과 우리의 시각 차가 너무 크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이 중요하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영적인 관점(마음)을

육체의 방식으로만 듣고 그 내용을 제한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죽은 자들' 이란 표현에 더욱 집중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라는 표현은 누가복음20장 38절에서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두개인들이 일곱 형제와 차례로 잠을 잔 여자가

부활 후 누구의 아내가 되냐며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다' 라는 대답 하시면서

'죽은 자' 란 표현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누가복음20;38,마가복음12:27)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산 자들이 누구라고 언급하시는가 하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영원히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는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느냐고 사두개인들에게 반문하십니다.

 

그러면 여기서 죽은 자들이란 누구를 두고 하는 말입니까?

 

바로 이 질문을 해온 사두개인(성직자들)들처럼

영의 세계를 도무지 믿지도 않으며 부활을 믿지도 않으며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의 계획과는 아무 상관없이 사는 자들로써

세상의 혼인, 관직, 장례, 부, 명예와 관련된 것에만 열심히 관심 갖고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실상 제사장의 신분을 가지고 있으나

하나님께 있어서는 죽은 자들로써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판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사두개인들에게 하십니다.

 

' 부활을 믿지 않는 너희들에게 부활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살아 있는 하나님을 비웃고

살아있는 하나님 나라를 비웃고

마치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냥

어줍잖은 태도로 말씀을 넘겨 보며

세상의 규율과 문화만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희는 사실상 하나님께 죽은 자들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이름을 매일 회당에서 들먹 거리고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사람들에게 교사 노릇을 해 왔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아무런 관계도 맺고 있지 않으므로

너희들은 하나님의 계획을, 부활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너희 죽은 자들과는 상관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이 살아있는 자들 안에서 영원히 사신다.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

 

우리는 이 땅 위에 태어나 사람이 만들어 놓은 문화와 규율에 따라

열심히 그것들을 실천하며 평생을 살아갑니다.

 

굳이 유교 문화를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장사 지내는 풍습은 모든 나라에 걸쳐 중요하게 여겨겨온 인류의 문화 유산입니다.

 

그런데 이런 풍습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땅에 묻는 의식은 사람의 불완전한 감정과 깊게 관계 맺고 생겨난 것입니다.

 

곧 죽은 사람을 방치할 경우 그 영혼이 고통을 받을꺼라는 생각들이나

시신을 잘 수습하고 묻어 주면 그의 영혼이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제사를 드리면 떠도는 혼령이 그 음식을 먹고 배고푸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등

 

남겨진 살아있는 자들이 가진 '죽은 자(망자)에 대한 미련과 죄책감' 등이

장사를 중요한 의식으로 만든 것입니다.

 

남겨진 자들은 죽은 자에 대한 정과 미련을 쉬이 끊지 못합니다.

그래서 깊은 땅에 묻는 의식을 통과하면서

자신이 사는 삶과 죽은 자의 삶을 분리시키는 정서적 해결책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사를 성대히 지내든 장사를 못 지내든 죽은 사람은 흙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길거리에서 비명 횡사한 사람이나

조용히 집에서 잠 자듯 숨을 거둔 사람이나

사람은 모두 죽으면 한달 안에 살이 부패하여 구더기의 밥이 다고

뼈도 시간이 흐르면 흙이 되어 나무의 거름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마지막날 모든 죽은 자가 하나님 앞에 일어나 그 삶을 평가받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정하신 일이며 죽은 자들에 대한 계획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허망한 감정으로 죽은 자와 교제를 시도하며 죽은 자를 위하여

시간과 재정을 계속 할애합니다.

하지만 죽은 자는 더이상 산 자와 교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Fact)입니다.

 

오직 관계라는 것은 '살아있는 동안만 맺을 수 있는 것'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살아있는 동안에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산자와만 맺는 동행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오늘날도

장례와, 제사, 망자에 직찹하며 시간을 할애합니다.

 

하지만, 장례를 아무리 잘 치뤄도 죽은 영혼에게는 더 이상 복음이 전해지지 않습니다.

장례를 잘 치루어도 죽은 자는 산 자에게 공양을 받지 못하며

영혼이 더 고통받거나 덜 고통 받게 되지 않습니다.

장례에 상관없이 모든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오직 살아 있는 동안 살아온 일들을 가지고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모든 관계를 맺으시고

살아있는 동안 우리가 천국에서 받을 유산을 결정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얼마나 받을수 있는가 하는 것이

오직 살아있는 동안에 결정된다는 사실을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써 인정되어 영광스러운 부활의 약속에 동참하게 될지 아닐지도

모두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결정될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 되면 예수님께서 지금 당장 나를 좇으라고 재촉하시는 것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살아 있는 자는

죽은 후에도 부활하여 영원히 하나님의 생명 속에 거합니다.

 

반면 장례식은 유한한 존재로 태어나 죄 속에 뭍혀 살다가 죽어야 하는

그러나 영원한 삶과 천국을 원했던 부족한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사후를 준비시키려고 만들어 낸 감정적 창조물인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복음서 여기 저기서 여러가지 비유를 들어 증언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오직 바로 이 순간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와 얼마나 관계맺고 있는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살지 않는 사람들은

어제와 같이 밭을 갈러 나갈 것이며, 혼인식에 나갈 것이며, 장사 하러 나가고

장례식을 찾아 다니겠지만

어느 날 하나님의 초청은 부지불식간에 끝난다는 사실을 잊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누가복음14:16-24절에 이 이야기는 소상하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노아의 때도 홍수가 나기 전까지 모두 장가 가고, 시집 가고

사람의 유행대로 살더니 갑작스런 심판이 모두에게 일시에 임한 사실을 말입니다.

 

(마태복음24:36-38 / 개역개정)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평생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를 궁리하며 삽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 누구와 혼인하며 아이를 낳고 살며

또 장례식을 어떻게 치룰까 생각하다 인생을 전부 보내게 됩니다.

 

사실 우리를 귀찮게 하는 수많은 보험 상품들은

현대인들의 육체에 속한 계획이 어느 날 일시에 무너질 수 있다는 불안감을

잘 보여주는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과 얼마나 관계 맺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는 이유로

우리 자신이 처한 심각한 위기성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오늘도 교회에 성경책을 끼고

왔다 갔다 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완전하게 죽은 자로 그 날에 판결 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영원한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평생을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불완전한 신화와

미신과 행복의 조건들을 따라

보험 들고, 적금 붓고, 결혼식 올리고, 아이를 낳고, 장례식만 치르다

어느날 죽게 될 것이며

눈을 다시 뜨고 사방을 둘러 보았을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며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죽은 자였음을 깨닫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가서 안다고 하여도 때는 늦은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믿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삶과 너무 다른 영원한 삶이 있다는 것,

새로운 약속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영적으로 살아있는 교제를 하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역사적으로 늘 있었다는 사실을

굳이 믿고 싶지도 알고 싶어도 않아 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지은 모래성 위에서 사는 것이

당장에 썩 나빠 보이지 않았기 떄문에

그것을 자랑하며 자신들의 불안감을 해소시켰습니다.

 

또 종교적 행위를 반복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나 된것 양

자기 마음에 암시를 걸었습니다.

 

그들의 정체를 간략히 정리해 보자면

세상의 계획에 의존하여 살면서

하나님과의 계획과는 아무 상관 없는 종교적 행위로만 자신을 치장하고 사는 것이

그들의 실체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가 세상에 의존할 곳이 조금도 없으리라 여기셨을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보고 있는 본문 누가복음 9:26절 바로 앞 구절에는 이런

증언이 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둥지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둘곳도 없다'

 

예수님께서 평소 자신이 무엇에 의지하며 사시는지를 명확히 밝히고 계시는 구절입니다.

 

그것은 썩어질 세상의 시스템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신실하신 약속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주실 영원한 안식처를 바라보고 계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는 또 한 걸음을 내 디딥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하려 하지도, 기대하려 하지도 않는 마음으로

오늘도 어제와 다를 바 없는사람이 만들어 놓은 온갖 행사를 챙기며

그곳에서 감정적인 안녕, 영원한 교류를 헛되이 지어내려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가장 우선적으로 예수님을 찾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 모두 그들의 고향을 등지고

세상의 풍습을 버렸으며 오직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을 좇아 살았습니다.

 

그들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에게 직업이, 고향과 가족이, 부모와 형제와 친구가 전혀 중요하지도 않으며

필요치도 않았기 때문일까요?

 

베드로는 먹고 살지 않아도 되서 그물을 던져 버렸으며

아브라함은 사람의 도움이 전혀 없이도 살수 있어서

고향을 등지고 광야로 나아간 것일까요?

 

사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여전히 밭을 갈고 장례를 치르며 혼인을 했습니다.

 

바울은 텐트를 만들어 팔았고, 베드로는 결혼 했으며

다비다란 여인이 죽었을때 그를 따르던 많은 여인들이

그녀의 집에 몰려 들어 장사를 지내며 슬피 통곡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베드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다 순교 했으며

다비다는 베드로가 기도로 죽음에서 다시 일어섰습니다.

 

다비다처럼, 베드로처럼, 바울처럼 우리도 부활의 약속에 이미 동참한 자가 되었을까요?

 

그러므로 잊지 마십시오. 부활의 약속에 동참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는 계획을 발견하고

그 계획에 침노해 들어갈수 있는 시간이

우리 각자에게 얼마나 남아 있는지는 아무도 알수 없습니다.

 

각 사람을 향한 새로운 창조의 계획을 이해하지 못하고

부모와 형제와 친구의 계획과 설계를 좇아 산다면

하나님 나라에서 당신은 무상속 자녀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아야 합니다.

 

많은 교회가 오늘도 교인들에게 간단한 주술만을 외우게 합니다.

예수란 이름만 믿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교회당에 열심히 다니고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란 주문만 열심히 외우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아십니까?

'예수' 란 이름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흔한 이름입니다.

 

나사렛에서 자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는 그래서 우리에게 이렇게 증언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늘' 에 계신 '나의 아버지'

뜻을 따르는 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

 

예수 주문을 외워도 육신의 아비 뜻을 따라 평생을 바친 사람은

하늘 나라를 물려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배움의 기회가 있을 때, 지금 이렇게 살아 있을 때

당신은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지금 선택하라고 예수님께서 단호하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죽은 일은 죽은 자들이 늘 하던 일입니다.

죽은 섬김은 죽은 자들이 죽은 방식으로 서로를 대해온 수천년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산 것을 받아 아버지의 영원한 계획대로 이 땅에서는 나그네처럼 살아야 합니다.

 

오천년 전이나 오천년 후에나

사람들은 죽은 일을 의미있게 보낸다고 자축하겠지만

그들이 심판대 앞에서 모두 죽은 자로 드러날 것입니다.

 

산자들은 오천년 전에나 지금이나 늘 하나님 앞에 살아 있어서

부활의 날에 하나님의 아들로 입증될 것입니다.

 

마지막 날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마라나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의 계획들이 모두 나타나고 있으며

그 계획마다 침노하는 자들이 들어가 얻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11:12)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 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굳이 뒤로 돌이키지 마십시오 (마태복음24:17)

 

예수님의 강력한 요청인 것입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