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26일 화요일

내가 네 발을 씻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유월절에 제자들과 함께

떡과 포도주를 나누신 일은

오늘날의 모든 신도들에게 중요한 의식으로 자리매김 해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이 의식을 어떻게 해석하고 재현하느냐를 두고

이단 시비를 할 정도로

오늘날 이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의식은 성스럽고 거룩하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주를 나누시면서 그것을 자신의 피라고 설명하셨고

나눠 주신 떡을 두고서는 자신의 살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피를 먹고 이 살을 먹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놀랍고

비밀이 가득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또 이것을 행하여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누가복음22:19)

 

요한복음 6장을 읽어 보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두고 가르치실 때에

제자들은 말하기를 '누가 이 말씀을 능히 알아들을까?' (60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놀라운 구절에 치중하다 보니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행하신 중요한 일이 더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 버린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주와 떡만 나누신 것이 아니라

수건을 두르시고 친히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 주셨습니다.

이것을 '세족식' 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면서

오늘날 교회에서 성찬식과는 별개로 재현하는 경우들이 가끔 있습니다.

 

사람들은 떡과 포도주를 나누시던 예수님의 모습은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암시한다 여기면서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은 단순히 '당나귀를 타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처럼

(싸우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겸손을 보이신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참 민망하고 가슴 아프지만 십자가에 못박히실 예수님을 두고서

제자들은 유월절 식탁에서 더 높은 자를 가리는 싸움을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 일은 놀랍게도 빵과 포도주를 나눈 직후에 발생한 일입니다.(누가복음 22장 24절)

그리고 이를 통해 알수 있는 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나눌 때에

오늘날처럼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의식이 거행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할수 있습니다.

 

잔과 떡을 받는 사람들은 심각하게 눈물 흘릴 자세를 취하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떡을 떼며 술을 마시다가 누가 높고 낮은지를 두고 제자들 사이에서 시비가 붙은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피와 살에 대한 언급을 하신 것을 제외하고는

그날 저녁 식사는 평소와 다름 없이 조용하고 편안한 저녁 시간이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13장에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으니

제자들이 다툰 일과 발을 씻기신 두 사건 사이의 연계성이 반드시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복음서의 저자들이 사건을 기록할 때도 그렇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원인과 결과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이 이야기를 되도록 함께 쓰려고 주의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또한 발을 씻기신 일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다투는 모습을 보고 즉흥적으로

생각해 내신 임기웅변이 아니었음도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 속에서 나타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고 떡을 떼어 주실때에는

아주 편안한 자세로 저녁을 먹고 있었고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어 질문하거나

심지어 말다툼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 제자들을 도리어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은

예수님께서 포도주와 빵에 대해서 설명하신 대목이 아니라

갑자기 대야에 물을 담아오라고 지시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평소 손을 씻지 않고 밥을 먹는다고 바리새인들에게 늘 비판을 받았습니다.

때문에 밥을 먹기 위해 손과 발을 씻을 일이 전에는 없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의 발을 씻겨 주려고 하자 극구 거절하면서

이러실수 없다고 예수님의 행동을 저지합니다.

 

그것은 종이 주인의 발을 씻겨 주는 것이 당시 문화의 상례였기 때문입니다.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겨 준다고 하니

더구나 '주님은 그리스도십니다' 라고 부르며 따르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행동이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런 의례적인 반응을 일축시켜 버립니다.

 

(요한복음13장 5절-14절 / 개역개정)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께서 자신의 발을 씻겨 주시는 것을 극구 거절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의도를 알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다른 제자들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나타내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반응에 따라 베드로는 이랬다 저랬다 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의 인간적인 사랑 표현 방식을 기뻐하시지 않았습니다.

(전에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막는 베드로에게 사단아 물러가라고 한적이 있었죠)

 

그보다는 자신의 영적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다시 한번 설명 하십니다.

 

그런데 자세히 본문을 읽어보면 이상한 점은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는 일을 지금은 제자들이 알수 없다고 하십니다.

 

발을 씻기는 일이 오늘날의 설교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다투는 제자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섬기는 본을 보이시려 했다면

그 정도의 메시지를 제자들이 왜 지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만약 베드로의 발을 씻겨주지 않으면 베드로와 자신이

상관이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이런 설명을 잠시만 생각해 보면 이것이 겸손과는 상관없는 말씀이라는

것을 금세 알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겸손을 보이지 않으신다고 해서 베드로와 상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이 자신과 제자들을 이어주는 강력한 고리임을 시사하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늘 가까워지고 싶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180도 태도를 바꾸어

온몸도 씻어 달라고 아이처럼 요청을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말씀을 읽을 때 율법주의로 인한 경직된 마음을 가지고 계셔서

느끼지 못하실 수 있으나 오늘날로 말하자면 목사에게 한 남자 성도가 말하기를

목사님, 목사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다면 오늘 목욕탕에 가서 제 온 몸을

다 씻겨 주실 수 있는지요? 라고 요청하는 것과 같은 대목입니다.

 

이는 평소에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가 얼마나 친 아버지와 아들처럼

혹은 연인처럼 친밀하고 격식이 없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보다도 더욱 어린 아이 같았던 베드로의 믿음을 엿볼 수 있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너희들의 온몸이 다 씻기워져서 발만 씻으면 된다며

더 이해하기 어려운 대답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것을 행하여 너희가 본받게 하려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말씀을 요약해 봅시다.

 

- 발을 씻겨주지 않으면 예수님은 제자들과 상관이 없게 된다 하셨습니다.

- 온 몸을 씻을 필요는 없는 것은 이미 온 몸을 씼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 이것을 행한 것은 제자들이 보고 본받으라고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씻는 행위가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발을 씻든지 몸을 씻든지 그것은 몸의 먼지와 때를 벗겨

몸에서 더욱 광채가 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온 몸이 씻김을 받았다 하는 것은 온 몸이 밝아졌다(full of light)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몸(body)이 실제 육체(flesh)를 뜻하는가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목욕을 지시 받은 후 유월절 식탁에 모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제자들의 몸을 씻은 것일까요?

성경에는 아래와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25-27절 / 개역개정)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마태복음 6장 22-23절 / 개역개정)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여기서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심이

마치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듯 하셨다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씻으실때 이런 마음으로 씻어 주셨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교회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이 하게 하시려 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즉 물로 씻김을 받는다는 것은 말씀으로 깨끗하게 된다는 뜻임을 알수 있습니다.

눈이 어두워지면 몸이 어두워진다는 것 역시 말씀을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어두워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복음서 저자들은 가롯 유다가 깨끗하게 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 눈이 밝아진 것일까요?

그들은 온 몸이 이미 다 성하게 된 것일까요?

그래서 다시 씻을 필요가 없다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신 후 성령을 보내 주실때까지 태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그들의 몸이 씻어졌다고 선언하신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아가는 양심이 그들 안에서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21절 / 개역개정)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예수님께 발을 씻기운 베드로는 말합니다.

 

우리가 물로 세례를 받을 때에 육체의 더러운 것이 제하여 없어져 버린 것이 아니라

선한 양심이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의 씻어짐으로 인해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아가는 양심이 생겨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그들이 이미 말씀을 받아 새로워진 양심으로 하나님 앞에 선

새로운 사람들임을 선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일 주님을 찾아가는 과정을 밟으면서 실수하고

연약함으로 넘어지며 거짓말의 영에 속아 넘어갑니다.

우리는 깊은 강과 수렁을 두발로 밟으면서 지납니다.

말씀의 약속은 마음으로 받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두 발입니다.

우리는 계속 걸어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는 믿음의 계속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자이나 문자주의자들, 윤리주의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믿음과 영의 세계에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영의 자녀들이 좇아가는 과정에서

'더럽혀 지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은 율법안에 갖혀 있지 않고 성령이 주는 자유로운 삶 안에서

모든 것을 스스로 경험하며 부딪히며 선악을 분별하는 성년으로 자라날 것입니다.

 

그러러면 그들은 수없이 진흙에 빠져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그런 믿음의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으시며 친히 그 발을 씻어 주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좇아가는 양심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

'외모로 판단하며 심판하는 육신의 사람들' 의 정죄는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영혼에 잘못된 점을 직접 교훈해 주시며

그들의 발걸음을 바로잡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우리의 발을 씻어 주시지 않으신다면

우리 모두는 좋은 양심만 가질 뿐

정죄와 두려움으로 인해 의의 사람으로 거듭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꼐서는 지금은 너희가 내가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리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미래에 예수님께서 믿는 자들과 하실 동역의 비전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성령의 생명의 법으로 옮기운 자들을 다시는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그의 외모를 두고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판단하든지

그들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좇아가는 양심이 생겨난 것을 보고서

그를 이미 깨끗하다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의 눈은 밝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곳곳의 모든 몸이 밝아지려면 시간이 더 많이 걸립니다.

그들은 굳은 마음이 제하여지고 부드러운 마음을 이미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모험을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필연적으로 우리가 이 모험에 들어설때 우리가

정죄감으로 덜컥거릴줄 아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들을 판단하고 미워할 것을 아셨습니다.

종의 아들 이스마엘이 자유한 자의 아들 이삭을 핍박할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삭의 자녀들의 발을 친히 씻겨 주시며 안아 주십니다.

우리가 실망치 않으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를 정죄치 않는다. 그러니 다시는 죄의 길로 다니지 말아라(Go From now on sin no more)'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해 주십니다.(요한복음8:11)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신 후 그들과 영원히 헤어져야 했고

자신들의 제자들은 머나먼 믿음의 모험을 시작해야 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그 길을 미리 준비하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항유 옥합을 깨뜨리고 머리로 자신의 발을 닦아준 마리아에게

그가 한 일이 자신의 죽음을 예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처럼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들의 발을 하나 하나 씻어 주시고

그들이 걸어야 할 믿음의 길을 예비하여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비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극진히 섬긴 그것처럼

바로 자신이 마리아의 마음이 되어 자신의 제자들을 극진히 섬기신 것입니다.

 

많은 교사들이 오늘도 성찬식이라는 의식을 집정하고 세족식이라는 의식을 행하지만

거만한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손가락만 까딱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식사때에 이런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십니다.

 

(누가복음 22장 25-27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왕들은 백성들 위에 군림한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은인으로 행세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가장 큰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하고, 또 다스리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한다.

누가 더 높으냐? 밥상 앞에 앉은 사람이냐? 시중 드는 사람이냐?
밥상 앞에 앉은 사람이 아니냐?
나는 시중드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와 있다.


 

오! 예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시중 드는 사람으로 와 계십니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중요한 말씀을 이해하길 거부하고 건너 뛰어 버리는 것일까요?

 

나는 이 말씀을 기억하고서 내가 사랑하는 자들에게 포도주를 따르고 빵을 나눌 때에

내게 와서 음식을 받아간 후 자리로 돌아가 조용히 그것을 입에 넣고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묵상하라고 지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음료와 떡을 먹고 마실 때에 예수님께서 나누어 주신 생명이

그들 마음에 충만히 운행 하도록 나는 그들을 끝까지 시중 들었습니다.

 

나는 그리고 베드로를 씻기시며 예수님께서 마음속으로 하셨을 그 말씀을 상상해 보며

그들의 발도 씻겼습니다.

 

'아이들아, 아이들아,

만약 내가 너희의 더러운 발을 지금껏 닦아 주지 않았다면

너와 내가 무슨 상관이 있었겠니?

내가 어찌 너의 선생이 되며 너희의 목자가 되겠니

 

내가 너의 발을 닦아 낼수록 너는 나와 관계있는 사람이 되고 나는

너에게 은헤를 끼칠수 있지 않겠니?'

 

오늘날 많은 교사들은 오래전 바리새인들처럼 깨끗한 것과만 상관하려 합니다.

즐거운 곳에만 있고 싶어합니다.

상좌에 앉길 좋아하며 좋은 옷을 걸치고 비싼 음식을 대접받길 좋아하며

사람들이 혐오하는 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즐거운 말로 서로를 상관 하는 그 때에

우리의 슬픔과 유일하게 상관하셨던 분이십니다.

아무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하는 오래 묵은 고민에 그분은 손을 대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역하려는 자녀들 안에서 영원토록 그의 약함에 관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실망하여 쓰러질 때라도

믿음의 눈을 뜨면 예수님께서 왜 닭이 울기 전 세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할 베드로에게

'내가 지금 너의 발을 씻지 않으면 너와 내가 상관없다' 고 하였는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조차 보고 싶어하지 않는 깊은 슬픔에 사로 잡혀

눈의 등불이 꺼져 갈 때에, 자기 연민과 어두운 과거의 상처에 빠져들어

반복되는 실패와 두려움 속에서 늘 거짓말 하고 살 때에

예수님께서는 수건을 두르시고 우리의 발을 닦으시며 말을 건내실 것입니다.

 

지금 나는 너의 상전으로 온 것이 아니라 너를 시중 들려 왔다고 말입니다.

 

그런 예수님께 언제나 감사를 드립니다.

 

 

 

2010년 1월 4일 월요일

예수님께서 타신 새끼 당나귀

 

 

왕이나 장군이 성에 입성할 때는

늠름한 말을 타고 들어가는게 일반입니다.

개선 행렬을 반기는 시민 앞에서 자신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왕들은 가장 늠름한 말을 골라 타며

그 위에 멋진 안장을 입힙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적토마와 같은 명마는

관우, 여포같은 천하 명장만 탈 수 있었으니

어찌 보면 훌륭한 탈 것이

그 주인의 영광을 드러내 주는 셈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때 제자들에게 새끼와 함께 묶여 있는 당나귀를

데려 오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왜 새끼를 데려 오라고 하시는지 처음에 영문을 알지 못했지만

명령에 순종하여 두 마리 당나귀를 함께 끌고 왔습니다 (마21:7)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미 당나귀가 아닌 새끼 당나귀 등에 올라 타셨고(마21:5)

제자들은 당황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중요한 입성을 앞두시고

실수가 생길수도 있는 길들여지지 않은 나귀를 타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자들 중 한명은 이 상황을 제빨리 이해하고서

어미 당나귀를 앞서 끌고 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끼 당나귀는 어미 나귀를 따라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새끼 당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계획이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새끼 당나귀만 끌고 오라고 시키지 않으시고

새끼와 부모가 함께 묶인 나귀, 곧 두마리

끌고 오라고 제자들에게 시키신 것입니다.

 

일부 설교자들은 이런 구절을 자세히 살피지 못하고

그저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춰 겸손의 본을 보이시려고 이런 일을 행하셨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골로새서2장18절은 <과장된 겸손> 에 대하여 권면하고 있는데

겉으로 나타내는 과장스런 겸손이 실상 자신을 자랑하고자 하는 욕망을 제어하는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신이 자신을 스스로 낮추어야 할 아무런 목적이나 경위가 없는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평소 하던 것보다 더 크게 겸양하는 액션(action)을 취하는 일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칭찬을 하게 하려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다른 왕들보다 자신을 더 낮추시기 위해

새끼 나귀를 굳이 골라 타셨다 하면

차라리 평소의 모습대로 예루살렘을 맨발로 걸어 들어가시는 편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왕의 형상이 아닌 종의 형상을 입고 우리에게 이미 오셨다고

증언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왜 어정쩡하게 자신을 높이면서

(탈것 위에 오르는 왕으로써의 행위)

또다시 그것을 통해 겸손의 모습을 우리에게 가르치려 드신다는 것입니까?

 

일부 교사들의 그런 편리한 해석들은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상식적이고 표면적인 겸손 행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21장 5절에서 제자들이 증언하고 있던는

새끼 나귀 등에 오른 그리스도의 겸손이란 진실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먼저 그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당나귀란 동물에 대해 알아보기로 합시다.

 

나귀는 이스라엘 근방에서 교통, 농사, 운송 수단으로 늘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던

가축이었는데 귀인들이 타고 다니던 값비싼 흰 암나귀를 제외하고는

모두 보통 심한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공동번역본 성경에만 실려있는 집회서의 33장 25절을 살펴 보면

심지어 당나귀에게는 여물과 몽둥이와 짐을 안겨주고

종에게는 빵과 벌과 일을 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민수기 22장 27절에는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나귀가 더이상 길을 가려 하지 않자 주인 발람이

지팡이로 나귀를 사정 없이 후려 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자 천사가 당나귀의 입을 열어 자신이 평생 주인을 성실히 섬겼는데도

주인은 왜 자신에게 이렇게 폭력을 쓰는지 항변하는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당나귀의 억울함을 주인에게 말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을 보면

하나님께서 부당한 폭력을 행하사는 사람을 늘 마땅치 않게 여기시며

잘못된 처우를 받는 동물이라도 그 억울함을 신원해 주시는 듯 합니다.

 

이런 연유로 당나귀는 안식일날

일을 시키지 못하도록 아예 율법이 정해 놓고 있습니다.(신명기5:14)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당근과 채찍' 이란 속담은

당나귀를 길들이는 과정에서 생겨난 속담입니다.

 

당나귀는 고집 쎄고 자유 분방한 동물이라 여겨져 많은 사람이 길들일때 채찍과 당근을

사용해 왔습니다.

화가 난 당나귀가 사람에게도 뒷발길질을 하는 불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근만 주면 온순한 양처럼 잘 따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당나귀를 선택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 있어 이 당나귀는 어떤 존재였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맘에 쉼을 얻으리라

 

이것은 우리를 양(lamb)으로 보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당나귀는 누구일까요?

이 당나귀 역시 우리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은 어디를 뜻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들어가게 될 영화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미천한 당나귀와 함께 입성의 영광을 나누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많은 시민들이 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나아올떄

어린 나귀 새끼도 함께 환호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비전인 것입니다.

 

우리가 마지막 날, 영광의 보좌로 걸어 나아갈 때에

하나님의 도성, 백성들과 천군, 천사들이 환호하며 우리를 맞을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택하신 당나귀입니다.

그것도 새끼 당나귀입니다.

길들여지지 않고 자유 분방하며 고집이 쎈 새끼 당나귀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와 이 길을 동행하며 하늘 천국에 입성하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멋지고 튼튼하고 날쎄고 잘 훈련된 말들과

영광을 나누길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고 주인의 고삐질도 잘 알지 못하는

두려움이  가득하고 연약한 우리와 함께

마지막 날에 영광을 누릴 천성을 향해 걸어 나가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약속대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우리가 비록 나약하고 새끼 당나귀 같을지라도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자신의 동역자로 선택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채찍도 당근도 아닌 여물도 몽둥이도 아닌

바로 암나귀를 내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사랑과 믿음의 관계를 통해 우리가 천성을 향해 나아가게 하십니다.

상과 벌, 율법이 아닌 바로 사랑의 새로운 관계를 통해

새끼 나귀는 그렇게 어미 나귀를 따라 나섭니다.

 

당근 때문도 아니고 채찍 때문도 아니며

단지 어미 나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귀는 그 길을 따라 걷습니다.

그리고 걷다 보면 우리는 어느덧 예루살렘에 입성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어린 우리를 사랑과 신뢰 안에서 이끄시고

하나님 나라까지 함께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어미 나귀와 함께 새끼 나귀의 등에 오르신 이유인 것입니다.

 

 

 

 

 

2010년 1월 2일 토요일

오전부터 일한 사람과 오후부터 일한 사람의 품삯이 같은 이유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하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어떤 포도원 주인과 같다'

 

마태복음 20장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 이야기는 이 땅위의 농장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포도밭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

독자들에게 다시 한번 주지시켜드립니다.

 

이 이야기는 여러분이 한번씩은 들어 보았을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 기괴한 결말 때문에

대부분 독자들이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넘겨버렸을 것입니다.

 

그것은 언뜻 불공정하고 횡포를 부리는 어떤 포도밭 주인의 이야기 같기 떄문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포도원에 주인이 있었는데 그 주인이 하루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인부를 고용하려고

직접 길거리로 나갔습니다.

그는 이른 아침에 만난 인부들에게 하루 품삯을 주기로 합의 를 한 후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일찍이 보냈습니다.(2절)

 

그리고 거기서 고용을 멈춘 것이 아니라 9시에 또 길거리에 나가 빈둥대는 사람들에게

적당한 품삯 을 약속하고 자기 포도밭에 보냈습니다.(4절)

 

그리고 12시, 3시에조 길가로 나가서 놀고 있는 사람을 고용했습니다.

그리고 5시에 길가에 나가 보니 아직도 빈둥거리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왜 당신들은 온종일 하는 일 없이 빈둥대고 있소?' 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이들은 '우리를 써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을 했다.(7절)

그러자 주인은 '어서 내 밭으로 가시오~' 라고 말하며 그들을 모두 고용합니다.

 

물론 이들에게도 9시 이후에 고용한 사람들처럼

품삯을 얼마 쳐 주겠다고 구체적으로 이야기 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제일 마지막으로 포도밭 주인이 채용한 사람들은

주인의 제안에 '에휴~ 장난하십니까? 이제 가면 제가 얼마나 벌겠습니까?

한시간도 안남았는데 그냥 안가겠습니다' 하지 않았고

이 선한 주인의 제안을 얼른 받아들였다는 겁니다.

품삯 애기도 구체적으로 없었는데 말입니다.

이 점을 꼭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결국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주인이 하루 품삯을 셈하는데 마지막에 온 사람들부터 거꾸로 품삯을 지불해 주라

했는데 모두가 한데나리온씩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뒷줄에 서서 지켜 보던 인부들은 속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오~ 나는 저들보다 더 일했으니 저들보다 좀 더 받겠구나 이히히~'

 

하지만 그들의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주인은 당시의 하루 일당인 한 데나리온을 모두에게 일괄적으로 지급한 것입니다.

 

그러자 아침부터 일한 인부들이 뿔이 나 버렸습니다.

 

" 주인님, 마지막에 온 사람들은 겨우 한 시간밖에 일 안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10배나 더 많이 일한 사람

(최소한 오전 9시 이전부터 오후 6시까지 일을 하였기 때문에 대략 10시간을 노동한 것임)

에게 똑같이 급여를 지불할 수 있는 겁니까?

이건 부당한 처사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일한 인부들은 볼멘 목소리로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아침에 당신들에게 하루 일당을 약속하지 않았소?

그대 품삯이나 받고 돌아가시오.

그리고 마지막에 온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는게 내 뜻이요,

내 것으로 내가 마음대로 못한단 말이요?

내가 후하니 도리어 당신들 눈에는 그게 거슬리시오?"

 

특별히 대꾸할 말이 없게 만드는 반박입니다. 

생각해 보면 고용주는 고용인을 쓸때 마음대로 그 삯을 지불 할 수 있습니다.

현대 시장 경제에서도 이것은 똑같습니다.

 

계약을 맺은 사람이 계약대로 계약금을 노동자에게 지불하면 되는 것이지

고용주가 고용한 각 사람들에게 얼마나 돈을 지불하는지에 대해

피고용인이 왈가불가할 일은 아니지요.

 

하지만 여러분은 이 글을 읽고 또 읽어 보아도

뭔가 맘이 꺼름직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주인이 노동과 그에 따른 댓가의 형평성을

깨뜨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왜도 이 본문은

엿장수가 가위를 몇번 때리느냐는 엿장수 맘이다!

이렇게밖에 안 보일 것이며

평소 부지런함과 그에 따른 결실을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사람들은

이 본문을 읽을 때 화난 인부들과 동질감마저 느낄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래서 오늘날의 일부 교사들은 이 본문에 대하여 이런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한 것에 대한 상급을 얼마인지를 계산하면서 일하지 말고

순수하게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에 그저 감사하며 충성된 종처럼 일하라는 것입니다.'

 

얼핏 듣기에는 좋은 이야기지만

성경의 기록들은 그런 의견을 지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실 성경은 우리가 경기장에 들어선 선수들로써 선한 경주를 싸우고 있으며

그 성과에 따라서 우리가 받을 영광의 급이 다르다고

분명히 믿음의 경주를 열심히 해서 상을 많이 얻으라고 독려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4:7-8 / 표준새번역)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나를 위하여 의의 월계관 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만이 아니라 주께서 나타나실 것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월계관은 로마의 경기 승리자들에게 주어지는 관이라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고린도전서9장 23-24 / 표준새번역)

 

나는 복음을 전하려고 이 모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복음이 주는 복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
경기장에서 달음질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부 교사들의 상급을 기대하지 말고 헌신하라는 해석은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됩니다.

 

그러면 이 기묘한 본문은 대체 어떤 '하나님 나라의 원리' 를 우리에게 보여주려 하는 것일까요?

 

먼저는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주인 마음대로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는 것을

우리 모두에게 똑똑하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구요?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헌신, 봉사하는 양을 따져

우리를 칭찬하시기 보다

도리어 자신의 사랑을 이해하고 선뜻 받아들이는 사람을 더 좋아하시며

자기의 열심과 자존심 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에 더 반응하는 자들에게 복을 조건없이 베푸신다는 점이 그것입니다.

 

다시 설명하면 사람 스스로가 자신이 내는 열심으로 하나님께 상을 구하는 자들은

그저 계약 이행자들로만 하나님께서 보시지만

자신이 많은 것을 하지 못했더라도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늘 믿으며

하나님의 밭을 가꾸어 가는 사람들은 은혜를 베풀 줄 자로 여기며 좋아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게 바로 '사람의 마음이 가는 곳' 이 아닌 '하나님 마음이 가는 곳' 이랍니다.

아시겠습니까?

 

자. 지금도 도통 무슨 말인지 헛갈린다는 분들을 위해 다시 한번 본문 주변을 살펴봅시다.

 

오늘의 본문인 마태복음20장 이야기 바로 이전(19장)에 어떤 이야기가 실려 있는지 아십니까?

 

한 부자청년이 예수님께서 나아와 어떻게 하면 자신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청년을 보시고 너가 계명들을 지켰나고 물어 보았는데

그는 놀랍게도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청년을 보시며 기뻐하시며

'너같은 사람이 아니고서 누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다 여김받고 영생을 얻겠느냐'

칭찬 하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에게 이렇게 강권합니다.

 

"너는 부족한 것이 있는데 네 재산의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

 

그러자 이 부자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제자들이 놀라

대체 그렇다면 누가 능히 구원을 얻겠습니까? 라고 질문합니다.

 

(즉 계명을 다 지켜 행한 후에 자기 재산까지 다 팔아 이웃에게 나눠줘야만 영생을 얻는다는 식으로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짧고 굵은 말로 대답을 하십니다.

'사람으로는 못해도 하나님은 능히 하신다' 라는 신비로운 답변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면서 마태복음20장의 이야기를 이어 하신 것입니다.

 

아침 일찍 일하러 나온 인부들은 이 부자청년 같은 자들인 것입니다.

이 부자 청년은 모든 계명을 열심히 준행했습니다.

그는 참 부지런하고 성실했습니다.

 

그래서 이른 아침 일하러 온 인부들처럼

예수님께 더 칭찬을 받을수 있을꺼란 기대를 가지고

자신은 누구보다도 영생에 가까이 이르렀을 거라 여기며 나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말을 듣고 이내 근심하며 돌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으로 늘 성경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만약 우리가 이 부자 청년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얻으려 한다면

날이 갈수록 좌절에 빠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영생, 복을 율법을 실천함으로 얻으려 한다면

이것을 행해고서 또 내일 저것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느 정도 노력해야 하나님의 구원을 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부자 청년이신 분들은 꼭 물어 볼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답할 것입니다. "그런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축복과 생명은

애초부터 인간의 노력 따위로 살수 있는 선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께 더 사랑받기 위해 일부러 계명을 지키지 말아야 하며

길거리에서 빈둥대던 인부들처럼 있어야 하겠습니까?

어떤 분들 안에서 제 말을 듣고 빈정대는 감정이 머리를 든다 해도

본문의 이야기는 그런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게 아닙니다.

 

일부러 빈둥댄다 해도, 일부러 계명을 안 지킨다 해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이나 영생을 얻지 못하는 것은 매 한가지입니다.

 

단지 우리는 이 척박한 땅 위에 살면서

일한 만큼 받는데에만 익숙해지다 보니 '하나님의 나라' 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포도밭 주인은 이 세상 주인들과 달라

꼭 자신을 위해 10시간 일한 사람에게 1데나리온만을 지불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소유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노력으로 인해 자신의 가산이 더 더해지거나 감해질 것이 없는 분이라는

엘리후의 증언을 혹시 들어보지 못하셨습니까?(욥기35:6-7)

.

여러분이 주님의 나라에 무엇을 기여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주님 입장에서는 별것이 아닐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별것처럼 여기는 일에 우리는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오늘날 사람의 계산과 자존심에 기대어 살다 보니

반드시 일한 만큼 받아야 한다는 법을

자신에게도 적용하고, 이웃과 형제에게도 적용하고

심지어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까지 적용하려 듭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도리어 우리는 하나님의 부요를 깨닫지 못하게 되었고

아무 조건 없이 베푸시는 하늘의 사랑을 얻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많이 일해

하나님께 정당한 수당을 타 가는 자를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라

많이 일하든, 적게 일하든 언제나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를

기대하고 신뢰하는 믿음을 소유한 자를 더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이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끝내

마태복음20장을 읽고도 이해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에게 배운 경제 논리만이 머리속에서 빙글 빙글 돌아다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운 심중은 아예 안 보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존심 강한 부자 청년을 기뻐 하시지 않고 도리어 안타갑게 여기셨습니다.

오늘날의 열심당원과 율법주의자들이 모두 이런 죽음의 늪에 빠져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깨가 쳐져 돌아가는 청년을 향하여 마음속으로 외치고 계십니다.

 

청년아. 보아라!

장차 너보다 더 적게 일한 사람이 너보다 더 많이 받게 될 것이며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것이다. 이것이 내 영생과 구원의 계획이다.

(마태복음19:30, 마태복음20:16)

 

아멘,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3:10)

행위와 관련된 법은 지키려면 모두 지켜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로마서3:28)

그러나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얻는 방법은 우리가 그분의 선하심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믿음 밖에 없습니다.

 

이제 기억해 봅시다.

5시에 불러서 자기 밭에 일하게 한 사람은

'어 주인님, 1시간만 일하고 돈 받는 것이 제 양심에 허락되지를 않습니다.

저는 열심히 일한 후에 정당한 급여를 받겠습니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자존심 강한 사람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현대인들의 경제적인 양심을 보시고 늘 만족해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세운 법칙에 불과할 뿐이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선하심을 기대하고 바라보는 것,

그것이 예수님이 전하시는 구원의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나는 염치 없어도 늘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을 기대합니다.

늘 옆에서는 어떤 이가 오늘도 나에게 말합니다.

"너는 염치도 없이, 너가 한게 뭐가 있다고?

너가 나보다 사랑을 받을수 있다고 생각하냐?

무슨 자격으로?" 라고

 

그러면 저는 대답하고 싶습니다.

"나 자신 때문에 아니라 바로 그분 때문에 나는 오늘도 기대를 하는 것입니다"

라고요.

 

아버지의 인자와 자비는 영원하십니다.(시편136편26절)

그렇게 노래하며 나는 어린아이처럼 오늘도 그분에게 매달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구원을, 영생을, 사랑을 거래하길 원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그저 자신이 선함을 먼저 알아보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그렇게 하여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게 하시며 먼저 된 자들을 나중 되게 하십니다.

 

땅에서는 열심히 일한자가 많이 받으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자신의 열심을 의지하여 나아가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며 나아가는 자가 더 많이 받는 되는 법입니다.

 

그래서 주님, 나는 주님을 위해 오늘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했습니다.

저는 저 죄인과 같지 않았습니다. 하는 바리새인들보다는

가슴을 치며 도움을 구하던 세리가 의롭다 인정받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누가복음18:11-14을 꼭 읽어보시길)

 

이런 주제의 말씀은 회당의 열심 있는 교사들에게 거부 반응을 불러 일으킵니다.

이런 주제의 말씀은 스스로 경건하다 여겨 온 율법주의자들에게 갈등과 회의를 불러 일으킵니다.

이런 주제의 말씀은 여짓껏 하나님께 구원의 상을 얻어내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않고 봉사, 헌신해온 성도들에게 허탈감과 자괴감을 불러오는 치명적인

공황입니다.

 

그러나 어쩌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는 전혀 다른 자신의 놀라운 마음으로 지금도

우리를 초청하시며 복을 내리십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마음대로 하시겠다는데

하나님의 후하심이 뭐 잘못된 것이라도 있다는 것입니까?

 

저는 이런 말씀을 볼때마다 마음 속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도 한때 부자청년이 되려고 무척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체험하는데는 기어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만약 내가 지금껏 너무 건강하고, 너무 성실하고. 너무 의지가 강하여서

내가 옳다고 여긴 일들을 모두 지켜 내 왔다면

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여전히 눈뜨지 못하고

오늘도 이른 새벽에 일어나 주인과 계약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삶에는 아무런 인자함이 없었습니다.

털끝만큼의 은혜도 더 나은 보너스도 없었습니다.

 

그저 내가 지독하게 일한데로만 받는 상급만 늘 있었을 뿐입니다.

더 일해야 더 받는것, 그것이 내 몫이었습니다.

 

그러니 열심히 일한 만큼 상을 받으려 한 나는

성경 말씀대로 내 몫이나 받아 들고 쓸쓸히 집에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주님의 이 놀라운 제안에 너무나 감사가 넘칩니다.

나는 그분의 선하심에 주목해서 그분의 포도원에 들어 갈 때에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나의 노력으로 거래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의로움을 내세워 일하지 않으며

넘치는 감사로 그 문에 들어가며 그분의 궁전에 들어갑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포도밭을 경작합니다.

 

오늘도 일을 많이 마쳤냐구요?

걱정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저에게 오늘도 지나칠 정도의 삯을 지불하실테니 말입니다.

저는 오늘도 그것을 믿습니다.

 


 

 

 

 

2010년 1월 1일 금요일

잠시 멈추어 서서 - 첫번째 발걸음

사울은 다메섹 거리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려고

무려 예루살렘에서 240km나 떨어진 시리아의 수도 다메섹(다마스커스)까지

행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을에 도착하기 전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빛이 임하여

사울은 땅바닥에 꼬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사울아 어째서 너가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은 당황하여 그 음성을 향하여 대꾸합니다.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

 

여기서 주(Lord) 라는 용어를 쓰는 사울 자신도

사실 누가 지금 자기를 부르는지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자신에게 강한 빛을 비춘 대상이 천사 아니면 여호와의 영광일것이라 추측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빛 가운데 나타나신 이는 자신이 그토록 미워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사울은 시내로 들어가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다메섹 거리로 들어갔지만

사흘 동안 보지 못하여 식음을 전폐합니다.

 

사실 사울이 밥을 먹을 수 있었겠습니까?

사울이 예수와 마주쳤을 때 얼마나 당황했을지 상상 해 보십시오.

게다가 눈이 멀어 땅을 더듬는 상황이었으니 그 공포감으로 인해

입맛이 다 떨어져 버렸을 것입니다.

 

그때 다메섹에 살던 그리스도인 아나니아가

예수님의 명을 받아 사울을 찾아가게 되었고

그가 안수할때 사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고

사울은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답니다.

 

사울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련의 사건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힘들었을 것입니다.

삼일 동안 어둠 가운데 갖혀 지내며

자신이 부정해 온 예수의 살아계심에 대해 두려워 해야 했고

자신이 평생 지은 죄 값을 치르려면 소경이 되어야 하는지

자신에게 질문해 보았을 겁니다.

그리고 부활과 내세를 믿었던 율법학자로써

부활의 주를 부인한 자신이 구원이나 얻을 수 있을지

온갖 번민과 갈등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자신이 배운 학문이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는지

꼼꼼한 성격의 사울이 머리속으로

율법을(당시엔 신약이 따로 없었음으로 성경 자체를 율법서라고도 불렀음)

수없이 암송하며 되뇌어 보았을 것입니다.

 

선지자 요나처럼 침묵의 어둠 속에 갖힌 삼일 밤낮이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어둠이 사울을 다시 토해냈을 때

사울은 꼬리 내린 강아지처럼 순순히 아나니아가 시키는 일을 따라 했을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임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손에 자신을 의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이 다시 볼수 있게 되자

곧바로 사울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사도행전9장18절)

그리고 음식을 먹고 기운 차린 사울을 예수 믿는 모임에 데려갔습니다.

 

사울은 그곳에서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마음을 정리했을 것입니다.

몇일이 지나자 사울은 회당을 돌아다니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20절)

 

사울이 이렇게 큰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기까지는 채 몇주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어렸을때부터 하나님을 섬기던 데 열심 있는 자였습니다.

할렐 학파의 가말리엘 문하에서 엄격한 율법을 공부하며 자란 사람이었으며다.

새로운 이야기를 전하고 다니는 그리스도인들을 모두 이단으로 여기고

그들을 잔해하는데 앞장 섰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스스로 자처하면서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받아 다메섹으로 가 그리스도인들을 모두 잡아들이려 했습니다.

사울은 이처럼 하나님을 위하여 옳다 여기는 일을 실천으로 옮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호흡을 가다듬고 사울을 바라 보면서 생각을 좀 해 봅시다.

혹시라도 우리의 삶이 이 예수를 만나기 전 사울의 모습과 깉지 않은지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각자 옳다 하는 바로 열심 있게 신앙 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과 다른 형태로 신앙 생활을 하는 자들을 별 생각없이 이단으로 몰아 세우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약 자신의 열심이 혹 사울처럼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 해 보신적은 있으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마귀의 종이나 타락한 사람들, 심지어 미치광이 집단이라고 여긴 사람들이

사실은 쉬이 이해하기 힘든 그리스도의 진리를 따라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을 미워하는 여러분의 잘못된 열심이 예수의 몸을 박해하는 것이라면 어찌하시렵니까?

 

많은 사람들은 저의 이런 질문에 크게 동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은 대부분 전혀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죠.

그래서 다들 당당하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저의 신앙은 절대 그럴수 없습니다.

오랬동안 교회를 출석해 왔지만 어떠한 이상한 일에도 빠진 적 없습니다.

제 주변 교우들 모두 지역 사회에서 모두 인정받고 건전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한쪽으로 치우친 적이 없이 온전한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겨 왔고

전통적이고 권위있는 기관에서 항상 성경을 배워왔습니다.

제 자격증과 신분이 그것을 말해주지 않습니까?

 

제가 비정상적이라고 여기는 신앙인들은 소위 생활 패턴에 규칙이 없고

혼잡하며 윤리 규범을 중요시 여기지 않고

전통을 무시하며 신비로운 것들만 좇는 자들이니

그들의 열매(?)로 보아 그들은 이단이 확실합니다.

 

그들이 죄 가운데 빠져 있으니 그들이 그릇되다 세상에 외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요.

또 내가 만약 하나님의 일을 거스르고 선지자를 박해하고 있다면

진작에 하나님께서 나를 벌하셔서 그 일을 하지 못하게 하시지 않으셨겠습니까?"

 

저는 이런 고백을 사울도 동일하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사울은 위에서 말하는 화자의 배경에 정확히 들어 맞는 삶을 살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런 사울이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았을 때

위에서 서술한 내용들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 모습들이었기에

이단으로 판단 했을 것이 자명합니다.

 

또 사울은 자신이 주님의 일을 거스리고 있다면 그에 상응한 벌을 이미 받았을 것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모두 사실이 아닙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사르는 불을 내려 달라고 요청했던 제자들을

꾸짖으시면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요한복음12:47)

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우리의 생각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할때마다

그에 상응하는 벌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신다면

우리 중 몇 명이나 하늘을 쳐다 보며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마 그를 통해 깨닫기는 커녕 두려움에 빠져 땅에 얼굴을 처박고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우리의 대 제사장께 긍휼을 얻지 못한다면

이 땅에는 하나님과 교제할수 있는 자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열심 있고 보수적인 신앙심 자체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해괴해 보이는 이단 그리스도인들을 미치광이라 여겨서

스데반이 돌로 맞아 죽을 때도 돌로 치는 자들의 옷을 받아줄 정도로

자신의 감정과 정신이 온당하고 의롭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눈이 멀게 됨으로써 그러한 자신의 선택이 모두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렸을때부터 전통있는 가문에서 권위있는 사람들에게 배우며 자랐지만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여 겉모습만 보고 성령을 훼방했습니다.

그가 최소한 자신이 눈먼 자임을 깨닫기 전까지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길을 열심히 선택하여 오늘도 걷고 있습니다.

자신이 잘못 될 수도 있다는 생각 자체는 자신을 약하게 만든다는 생각 때문에

아예 꺼리낌이 되었습니다.

그저 자신의 옳음을 입증하려고 더욱 많은 사람을 오늘도 자신의 생각에 동조시키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시적인 성과를 쌓아 올리려 노합니다.

 

때로는 자신과 반대하는 자들을 미워하고 욕하여 자신과 우리들의 힘을 자랑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응답없는 삶을 사는 것에 대해서는

그저 하나님을 속절 없이 원망하거나 자신의 믿음이 부족하다고 여기며

(하지만 최소한 잘못된 길에 빠진 것은 아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갈 뿐입니다.

 

네 우리는 이렇게 살아갑니다.

이러한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다메섹에 도착해 버리기전에 눈 먼 역사가 있으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나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왔습니다.

그 이후 여러 번 내가 확신하며 가던 길에서 완전히 소경이 되어 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외적으로는 고열에 시달리거나 위경련에 시달리고 음식을 넘길수 없는 상태가

빈번하게 되었으며

내적으로 삼일 밤낮보다 더 길고 어두운 고기 뱃속에 꼼짝 없이 드러 누워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겨우 기운을 차리고 다시 일어났 때에는

나는 내 삶속에서 지녀온 확신이

도리어 하나님의 사랑을 강력히 거절하게 하며

내가 지닌 과거의 열심이 그분의 사랑이 다가오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나의 의지로 일해 왔으며 예수의 뜻과 마음이 아닌 판단으로 일해 온것을

알았을때 나는 소경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길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만나는 자들은 모두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눈이 멀고 뜨는 경험 을 반드시 합니다.

이것은 참 놀라운 일이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지만 예수를 좇지 않는 자들은 절대로 소경될 일이 없습니다.

눈이 멀어도 지팡이를 짚게 되었어도

소경된 마음만 지닌체 자신이 고집한 길을 멸망의 날까지 걸어갈 뿐입니다.

 

지금 이순간도 우리 모두는 얼마나 옳은 길을 따라 걷고 있는 것일까요?

그 길들이 예수의 삶을 따라 생명에 이르게 하는 발걸음일까요?

아니면 도리어 예수의 피로 세운 자들을 핍박하거나

예수의 영을 대적하러 가는 다메섹으로의 발걸음일까요?

 

우리가 자신의 소경됨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눈을 떠야 하는 어린 아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서

다 자란 어른처럼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요?

 

(요한복음9장39절41절 / 개역개정)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