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유월절에 제자들과 함께
떡과 포도주를 나누신 일은
오늘날의 모든 신도들에게 중요한 의식으로 자리매김 해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이 의식을 어떻게 해석하고 재현하느냐를 두고
이단 시비를 할 정도로
오늘날 이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의식은 성스럽고 거룩하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주를 나누시면서 그것을 자신의 피라고 설명하셨고
나눠 주신 떡을 두고서는 자신의 살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피를 먹고 이 살을 먹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놀랍고
비밀이 가득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또 이것을 행하여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누가복음22:19)
요한복음 6장을 읽어 보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두고 가르치실 때에
제자들은 말하기를 '누가 이 말씀을 능히 알아들을까?' (60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놀라운 구절에 치중하다 보니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행하신 중요한 일이 더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 버린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주와 떡만 나누신 것이 아니라
수건을 두르시고 친히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 주셨습니다.
이것을 '세족식' 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면서
오늘날 교회에서 성찬식과는 별개로 재현하는 경우들이 가끔 있습니다.
사람들은 떡과 포도주를 나누시던 예수님의 모습은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암시한다 여기면서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은 단순히 '당나귀를 타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처럼
(싸우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겸손을 보이신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참 민망하고 가슴 아프지만 십자가에 못박히실 예수님을 두고서
제자들은 유월절 식탁에서 더 높은 자를 가리는 싸움을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 일은 놀랍게도 빵과 포도주를 나눈 직후에 발생한 일입니다.(누가복음 22장 24절)
그리고 이를 통해 알수 있는 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나눌 때에
오늘날처럼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의식이 거행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할수 있습니다.
잔과 떡을 받는 사람들은 심각하게 눈물 흘릴 자세를 취하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떡을 떼며 술을 마시다가 누가 높고 낮은지를 두고 제자들 사이에서 시비가 붙은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피와 살에 대한 언급을 하신 것을 제외하고는
그날 저녁 식사는 평소와 다름 없이 조용하고 편안한 저녁 시간이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13장에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으니
제자들이 다툰 일과 발을 씻기신 두 사건 사이의 연계성이 반드시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복음서의 저자들이 사건을 기록할 때도 그렇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원인과 결과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이 이야기를 되도록 함께 쓰려고 주의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또한 발을 씻기신 일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다투는 모습을 보고 즉흥적으로
생각해 내신 임기웅변이 아니었음도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 속에서 나타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고 떡을 떼어 주실때에는
아주 편안한 자세로 저녁을 먹고 있었고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어 질문하거나
심지어 말다툼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 제자들을 도리어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은
예수님께서 포도주와 빵에 대해서 설명하신 대목이 아니라
갑자기 대야에 물을 담아오라고 지시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평소 손을 씻지 않고 밥을 먹는다고 바리새인들에게 늘 비판을 받았습니다.
때문에 밥을 먹기 위해 손과 발을 씻을 일이 전에는 없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의 발을 씻겨 주려고 하자 극구 거절하면서
이러실수 없다고 예수님의 행동을 저지합니다.
그것은 종이 주인의 발을 씻겨 주는 것이 당시 문화의 상례였기 때문입니다.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겨 준다고 하니
더구나 '주님은 그리스도십니다' 라고 부르며 따르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행동이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런 의례적인 반응을 일축시켜 버립니다.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께서 자신의 발을 씻겨 주시는 것을 극구 거절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의도를 알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다른 제자들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나타내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반응에 따라 베드로는 이랬다 저랬다 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의 인간적인 사랑 표현 방식을 기뻐하시지 않았습니다.
(전에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막는 베드로에게 사단아 물러가라고 한적이 있었죠)
그보다는 자신의 영적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다시 한번 설명 하십니다.
그런데 자세히 본문을 읽어보면 이상한 점은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는 일을 지금은 제자들이 알수 없다고 하십니다.
발을 씻기는 일이 오늘날의 설교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다투는 제자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섬기는 본을 보이시려 했다면
그 정도의 메시지를 제자들이 왜 지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만약 베드로의 발을 씻겨주지 않으면 베드로와 자신이
상관이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이런 설명을 잠시만 생각해 보면 이것이 겸손과는 상관없는 말씀이라는
것을 금세 알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겸손을 보이지 않으신다고 해서 베드로와 상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이 자신과 제자들을 이어주는 강력한 고리임을 시사하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늘 가까워지고 싶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180도 태도를 바꾸어
온몸도 씻어 달라고 아이처럼 요청을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말씀을 읽을 때 율법주의로 인한 경직된 마음을 가지고 계셔서
느끼지 못하실 수 있으나 오늘날로 말하자면 목사에게 한 남자 성도가 말하기를
목사님, 목사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다면 오늘 목욕탕에 가서 제 온 몸을
다 씻겨 주실 수 있는지요? 라고 요청하는 것과 같은 대목입니다.
이는 평소에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가 얼마나 친 아버지와 아들처럼
혹은 연인처럼 친밀하고 격식이 없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보다도 더욱 어린 아이 같았던 베드로의 믿음을 엿볼 수 있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너희들의 온몸이 다 씻기워져서 발만 씻으면 된다며
더 이해하기 어려운 대답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것을 행하여 너희가 본받게 하려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말씀을 요약해 봅시다.
- 발을 씻겨주지 않으면 예수님은 제자들과 상관이 없게 된다 하셨습니다.
- 온 몸을 씻을 필요는 없는 것은 이미 온 몸을 씼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 이것을 행한 것은 제자들이 보고 본받으라고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씻는 행위가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발을 씻든지 몸을 씻든지 그것은 몸의 먼지와 때를 벗겨
몸에서 더욱 광채가 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온 몸이 씻김을 받았다 하는 것은 온 몸이 밝아졌다(full of light)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몸(body)이 실제 육체(flesh)를 뜻하는가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목욕을 지시 받은 후 유월절 식탁에 모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제자들의 몸을 씻은 것일까요?
성경에는 아래와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마태복음 6장 22-23절 / 개역개정)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여기서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심이
마치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듯 하셨다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씻으실때 이런 마음으로 씻어 주셨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교회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이 하게 하시려 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즉 물로 씻김을 받는다는 것은 말씀으로 깨끗하게 된다는 뜻임을 알수 있습니다.
눈이 어두워지면 몸이 어두워진다는 것 역시 말씀을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어두워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복음서 저자들은 가롯 유다가 깨끗하게 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 눈이 밝아진 것일까요?
그들은 온 몸이 이미 다 성하게 된 것일까요?
그래서 다시 씻을 필요가 없다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신 후 성령을 보내 주실때까지 태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그들의 몸이 씻어졌다고 선언하신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아가는 양심이 그들 안에서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예수님께 발을 씻기운 베드로는 말합니다.
우리가 물로 세례를 받을 때에 육체의 더러운 것이 제하여 없어져 버린 것이 아니라
선한 양심이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의 씻어짐으로 인해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아가는 양심이 생겨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그들이 이미 말씀을 받아 새로워진 양심으로 하나님 앞에 선
새로운 사람들임을 선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일 주님을 찾아가는 과정을 밟으면서 실수하고
연약함으로 넘어지며 거짓말의 영에 속아 넘어갑니다.
우리는 깊은 강과 수렁을 두발로 밟으면서 지납니다.
말씀의 약속은 마음으로 받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두 발입니다.
우리는 계속 걸어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는 믿음의 계속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자이나 문자주의자들, 윤리주의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믿음과 영의 세계에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영의 자녀들이 좇아가는 과정에서
'더럽혀 지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은 율법안에 갖혀 있지 않고 성령이 주는 자유로운 삶 안에서
모든 것을 스스로 경험하며 부딪히며 선악을 분별하는 성년으로 자라날 것입니다.
그러러면 그들은 수없이 진흙에 빠져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그런 믿음의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으시며 친히 그 발을 씻어 주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좇아가는 양심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
'외모로 판단하며 심판하는 육신의 사람들' 의 정죄는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영혼에 잘못된 점을 직접 교훈해 주시며
그들의 발걸음을 바로잡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우리의 발을 씻어 주시지 않으신다면
우리 모두는 좋은 양심만 가질 뿐
정죄와 두려움으로 인해 의의 사람으로 거듭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꼐서는 지금은 너희가 내가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리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미래에 예수님께서 믿는 자들과 하실 동역의 비전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성령의 생명의 법으로 옮기운 자들을 다시는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그의 외모를 두고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판단하든지
그들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좇아가는 양심이 생겨난 것을 보고서
그를 이미 깨끗하다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의 눈은 밝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곳곳의 모든 몸이 밝아지려면 시간이 더 많이 걸립니다.
그들은 굳은 마음이 제하여지고 부드러운 마음을 이미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모험을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필연적으로 우리가 이 모험에 들어설때 우리가
정죄감으로 덜컥거릴줄 아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들을 판단하고 미워할 것을 아셨습니다.
종의 아들 이스마엘이 자유한 자의 아들 이삭을 핍박할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삭의 자녀들의 발을 친히 씻겨 주시며 안아 주십니다.
우리가 실망치 않으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를 정죄치 않는다. 그러니 다시는 죄의 길로 다니지 말아라(Go From now on sin no more)'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해 주십니다.(요한복음8:11)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신 후 그들과 영원히 헤어져야 했고
자신들의 제자들은 머나먼 믿음의 모험을 시작해야 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그 길을 미리 준비하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항유 옥합을 깨뜨리고 머리로 자신의 발을 닦아준 마리아에게
그가 한 일이 자신의 죽음을 예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처럼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들의 발을 하나 하나 씻어 주시고
그들이 걸어야 할 믿음의 길을 예비하여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비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극진히 섬긴 그것처럼
바로 자신이 마리아의 마음이 되어 자신의 제자들을 극진히 섬기신 것입니다.
많은 교사들이 오늘도 성찬식이라는 의식을 집정하고 세족식이라는 의식을 행하지만
거만한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손가락만 까딱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식사때에 이런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왕들은 백성들 위에 군림한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은인으로 행세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가장 큰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하고, 또 다스리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한다.
누가 더 높으냐? 밥상 앞에 앉은 사람이냐? 시중 드는 사람이냐?
밥상 앞에 앉은 사람이 아니냐?
나는 시중드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와 있다.
오! 예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시중 드는 사람으로 와 계십니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중요한 말씀을 이해하길 거부하고 건너 뛰어 버리는 것일까요?
나는 이 말씀을 기억하고서 내가 사랑하는 자들에게 포도주를 따르고 빵을 나눌 때에
내게 와서 음식을 받아간 후 자리로 돌아가 조용히 그것을 입에 넣고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묵상하라고 지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음료와 떡을 먹고 마실 때에 예수님께서 나누어 주신 생명이
그들 마음에 충만히 운행 하도록 나는 그들을 끝까지 시중 들었습니다.
나는 그리고 베드로를 씻기시며 예수님께서 마음속으로 하셨을 그 말씀을 상상해 보며
그들의 발도 씻겼습니다.
'아이들아, 아이들아,
만약 내가 너희의 더러운 발을 지금껏 닦아 주지 않았다면
너와 내가 무슨 상관이 있었겠니?
내가 어찌 너의 선생이 되며 너희의 목자가 되겠니
내가 너의 발을 닦아 낼수록 너는 나와 관계있는 사람이 되고 나는
너에게 은헤를 끼칠수 있지 않겠니?'
오늘날 많은 교사들은 오래전 바리새인들처럼 깨끗한 것과만 상관하려 합니다.
즐거운 곳에만 있고 싶어합니다.
상좌에 앉길 좋아하며 좋은 옷을 걸치고 비싼 음식을 대접받길 좋아하며
사람들이 혐오하는 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즐거운 말로 서로를 상관 하는 그 때에
우리의 슬픔과 유일하게 상관하셨던 분이십니다.
아무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하는 오래 묵은 고민에 그분은 손을 대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역하려는 자녀들 안에서 영원토록 그의 약함에 관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실망하여 쓰러질 때라도
믿음의 눈을 뜨면 예수님께서 왜 닭이 울기 전 세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할 베드로에게
'내가 지금 너의 발을 씻지 않으면 너와 내가 상관없다' 고 하였는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조차 보고 싶어하지 않는 깊은 슬픔에 사로 잡혀
눈의 등불이 꺼져 갈 때에, 자기 연민과 어두운 과거의 상처에 빠져들어
반복되는 실패와 두려움 속에서 늘 거짓말 하고 살 때에
예수님께서는 수건을 두르시고 우리의 발을 닦으시며 말을 건내실 것입니다.
지금 나는 너의 상전으로 온 것이 아니라 너를 시중 들려 왔다고 말입니다.
그런 예수님께 언제나 감사를 드립니다.
좀 밤에 늦게까지 급히 끝내느라 철자가 틀린게 많을 겁니다 교정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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