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4일 월요일

예수님께서 타신 새끼 당나귀

 

 

왕이나 장군이 성에 입성할 때는

늠름한 말을 타고 들어가는게 일반입니다.

개선 행렬을 반기는 시민 앞에서 자신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왕들은 가장 늠름한 말을 골라 타며

그 위에 멋진 안장을 입힙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적토마와 같은 명마는

관우, 여포같은 천하 명장만 탈 수 있었으니

어찌 보면 훌륭한 탈 것이

그 주인의 영광을 드러내 주는 셈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때 제자들에게 새끼와 함께 묶여 있는 당나귀를

데려 오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왜 새끼를 데려 오라고 하시는지 처음에 영문을 알지 못했지만

명령에 순종하여 두 마리 당나귀를 함께 끌고 왔습니다 (마21:7)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미 당나귀가 아닌 새끼 당나귀 등에 올라 타셨고(마21:5)

제자들은 당황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중요한 입성을 앞두시고

실수가 생길수도 있는 길들여지지 않은 나귀를 타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자들 중 한명은 이 상황을 제빨리 이해하고서

어미 당나귀를 앞서 끌고 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끼 당나귀는 어미 나귀를 따라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새끼 당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계획이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새끼 당나귀만 끌고 오라고 시키지 않으시고

새끼와 부모가 함께 묶인 나귀, 곧 두마리

끌고 오라고 제자들에게 시키신 것입니다.

 

일부 설교자들은 이런 구절을 자세히 살피지 못하고

그저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춰 겸손의 본을 보이시려고 이런 일을 행하셨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골로새서2장18절은 <과장된 겸손> 에 대하여 권면하고 있는데

겉으로 나타내는 과장스런 겸손이 실상 자신을 자랑하고자 하는 욕망을 제어하는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신이 자신을 스스로 낮추어야 할 아무런 목적이나 경위가 없는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평소 하던 것보다 더 크게 겸양하는 액션(action)을 취하는 일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칭찬을 하게 하려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다른 왕들보다 자신을 더 낮추시기 위해

새끼 나귀를 굳이 골라 타셨다 하면

차라리 평소의 모습대로 예루살렘을 맨발로 걸어 들어가시는 편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왕의 형상이 아닌 종의 형상을 입고 우리에게 이미 오셨다고

증언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왜 어정쩡하게 자신을 높이면서

(탈것 위에 오르는 왕으로써의 행위)

또다시 그것을 통해 겸손의 모습을 우리에게 가르치려 드신다는 것입니까?

 

일부 교사들의 그런 편리한 해석들은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상식적이고 표면적인 겸손 행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21장 5절에서 제자들이 증언하고 있던는

새끼 나귀 등에 오른 그리스도의 겸손이란 진실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먼저 그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당나귀란 동물에 대해 알아보기로 합시다.

 

나귀는 이스라엘 근방에서 교통, 농사, 운송 수단으로 늘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던

가축이었는데 귀인들이 타고 다니던 값비싼 흰 암나귀를 제외하고는

모두 보통 심한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공동번역본 성경에만 실려있는 집회서의 33장 25절을 살펴 보면

심지어 당나귀에게는 여물과 몽둥이와 짐을 안겨주고

종에게는 빵과 벌과 일을 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민수기 22장 27절에는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나귀가 더이상 길을 가려 하지 않자 주인 발람이

지팡이로 나귀를 사정 없이 후려 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자 천사가 당나귀의 입을 열어 자신이 평생 주인을 성실히 섬겼는데도

주인은 왜 자신에게 이렇게 폭력을 쓰는지 항변하는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당나귀의 억울함을 주인에게 말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을 보면

하나님께서 부당한 폭력을 행하사는 사람을 늘 마땅치 않게 여기시며

잘못된 처우를 받는 동물이라도 그 억울함을 신원해 주시는 듯 합니다.

 

이런 연유로 당나귀는 안식일날

일을 시키지 못하도록 아예 율법이 정해 놓고 있습니다.(신명기5:14)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당근과 채찍' 이란 속담은

당나귀를 길들이는 과정에서 생겨난 속담입니다.

 

당나귀는 고집 쎄고 자유 분방한 동물이라 여겨져 많은 사람이 길들일때 채찍과 당근을

사용해 왔습니다.

화가 난 당나귀가 사람에게도 뒷발길질을 하는 불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근만 주면 온순한 양처럼 잘 따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당나귀를 선택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 있어 이 당나귀는 어떤 존재였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맘에 쉼을 얻으리라

 

이것은 우리를 양(lamb)으로 보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당나귀는 누구일까요?

이 당나귀 역시 우리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은 어디를 뜻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들어가게 될 영화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미천한 당나귀와 함께 입성의 영광을 나누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많은 시민들이 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나아올떄

어린 나귀 새끼도 함께 환호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비전인 것입니다.

 

우리가 마지막 날, 영광의 보좌로 걸어 나아갈 때에

하나님의 도성, 백성들과 천군, 천사들이 환호하며 우리를 맞을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택하신 당나귀입니다.

그것도 새끼 당나귀입니다.

길들여지지 않고 자유 분방하며 고집이 쎈 새끼 당나귀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와 이 길을 동행하며 하늘 천국에 입성하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멋지고 튼튼하고 날쎄고 잘 훈련된 말들과

영광을 나누길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고 주인의 고삐질도 잘 알지 못하는

두려움이  가득하고 연약한 우리와 함께

마지막 날에 영광을 누릴 천성을 향해 걸어 나가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약속대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우리가 비록 나약하고 새끼 당나귀 같을지라도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자신의 동역자로 선택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채찍도 당근도 아닌 여물도 몽둥이도 아닌

바로 암나귀를 내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사랑과 믿음의 관계를 통해 우리가 천성을 향해 나아가게 하십니다.

상과 벌, 율법이 아닌 바로 사랑의 새로운 관계를 통해

새끼 나귀는 그렇게 어미 나귀를 따라 나섭니다.

 

당근 때문도 아니고 채찍 때문도 아니며

단지 어미 나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귀는 그 길을 따라 걷습니다.

그리고 걷다 보면 우리는 어느덧 예루살렘에 입성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어린 우리를 사랑과 신뢰 안에서 이끄시고

하나님 나라까지 함께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어미 나귀와 함께 새끼 나귀의 등에 오르신 이유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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